• 최종편집 2024-04-23(화)

G.QT
Home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실시간뉴스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3_ 개혁의 촛불
    Jan Hus at the Council of Constance. 개혁의 촛불 일본 자동차 공세에 밀려 맥을 못 쓰던 미국 자동차업계를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이아코카였다. 그는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경영 철학과 경험은 세계에 물결을 일으켰다. 미국 내에서의 그의 인기는 너무도 대단해서 그는 워싱턴을 넘보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뉴욕타임즈는 칼럼까지 동원해 미국에 필요한 것은 일류 자동차 제조업자지 이류 정치가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아니 여보게들 아이아코카가 정치를 할 모양이네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영판 정치인 같은 어투로 말하고 있어』 요즘 정치 은퇴를 선언한 사람이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하는 말이 각 일간신문에 계속 실리고 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다. 위클리프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운동은 영국에서 별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보헤미아에서 지지를 획득했다. 그 당시 영국 왕이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을 했었다.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인 그 나라에서 존 후스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처럼 부패한 성직자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성직자들은 화려한 옷에 달린 술을 휘날리며 말을 탔고 은으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곤봉으로 가는 길에 거추장스런 사람들을 쫓았다. 후스는 거침없는 비난들 때문에 이단으로 고소를 당해 콘스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회부 되었다. 후스는 자신이 잘못 가르쳤다는 정죄에 대해 결코 그런 가르침을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경위야 어찌 됐든 후스는 그걸 취소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눈을 껌벅거리며 도대체 결코 가르친 적이 없는 걸 무슨 수로 취소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후스는 거절했고 유죄 판결을 받아 화형당했다. 화형당하는 후스(예나 약전, 15세기 후반) 그 결과 보헤미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고 성직자들의 뺨은 디룩디룩했다. 개혁의 불빛은 아직 희미했지만 여러 구석에서 촛불들이 타고 있었다. 독일 라인강 계곡을 따라 일단의 조용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수도원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접촉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그룹이 홀랜드에 있었는데 스스로를 『공동생활 형제』라고 불렀다. 그들은 늘 함께 살면서 물건을 함께 나누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치는데 보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을 교육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퍼뜨렸다. 특별히 학교와 대학교들을 통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 그룹을 통해 책이 한 권 나왔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성경처럼 읽히고 있다. 이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다. 어떤 형제가 썼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켐피스로 알려져 있다. 개혁의 촛불들이 희구하는 것은 하나님 교회의 사랑과 선의 회복이었다. 2022-03-1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3-1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그늘
    면죄부 판매 죄의 그늘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단지 교회의 탐욕만을 증가시켰다. 이유인즉슨 돈을 그러모으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청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교황의 오랜 부재로 토지들을 이웃 통치자들이 마구 짓밟아 못 쓰게 만들었다. 아비뇽에 자리 잡은 교황 요한 22세는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옛것이든 새것이든 온갖 짓을 다 했다. 물론 세례, 결혼, 장례 등과 같은 정식 예식에 돈이 부과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둘로 나눠 두 무덤에 매장하는 것조차도 돈만 내면 교회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유럽 어느 곳에 있든 명색이 주교이면 임지를 받을 때 1년 치 봉급을 고스란히 교황한테 바쳐야 했다. 요즈음 학교 선생이 될작시면 이런 꼴같잖은 일이 있다는데 그 옛날 교황한테서 학교 이사장들이 배운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주교직이 공석이 된다면 교황은 얼씨구나 하고 그 자리를 메우려고 다른 주교를 이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연쇄적으로 주교직이 한 자리씩 비게 되어 주교들이 전부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그런 뒤 교황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옮긴 주교들한테서 부임 첫해의 월급을 모조리 상납받게 된다.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면죄부를 파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죽은 사람이 연옥에서 괴롭게 지내야 되는 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교황의 허가증이었다. 그 사상은 연옥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성자들의 공로를 보관한 보물창고를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 증서는 타인에게 양도도 가능했다. 가난과 결혼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요한 22세와 같은 탐욕 덩어리 교황한테 지청구를 늘어놓고 교황을 이단이라고 몰아댔을 때 분노의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교황은 화가 지글지글 끓어올라 본보기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몇을 이단 심문관에게 넘겨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군주들이 이탈리아의 교회 소유 토지를 탈취해가자 교황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정말 힘써 그러모은 돈을 태반이나 전쟁터에서 허비했다. 교황은 교회가 교회답게 행해야 될 일에는 쓸 돈이 거의 없었다. 또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런데 쓸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70여 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뒤 사치와 교만의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성직자들은 아주 품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교회당과 그림과 책에 솔찬한 돈을 썼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잔치에 아주 많은 돈을 활수 하게 지출했다. 그들은 값비싼 의상을 걸쳤고 예배 행렬을 화려하게 꾸몄다. 교황은 강력함을 내보이려고 멋진 의자를 군인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게 했다. 평신도들은 고등종교의 신앙에서 낮은 마법의 주술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성만찬을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마법의 부적처럼 사용했다. 기독교에 만연된 치명적인 죄와 마법이 교회의 생명을 비칠거리게 했다. 사치의 죄에 빠진 교회 개혁의 외침과 시도들이 유럽 전역에서 불끈거리며 나왔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 어두운 만큼 밝은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2-02-28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2-28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교회 침범
    서방교회의 분열을 상징화한 14세기의 세밀화 죄의 교회 침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교황권을 튼튼하게 세운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도 죽고 교회와 세상에 신선하고 감동적인 영향을 미친 프란체스코도 죽었다. 이 세상은 악인만 죽는 게 아니라 의인도 덩달아 죽기 마련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 그런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쓰러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거듭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될 텐데. 어쨌든 이노켄티우스 3세와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중세는 내리막길을 마구 달렸다. 일단 지어진 대 예배당은 변함없는 매력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돌로 된 건물은 비바람으로 인한 마모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지닌 인간은 자기 특성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교회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을 침범했던 야만인들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교회에 끼쳤다. 그러나 야만인들이 로마인을 죄다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그 죄들이 교회의 모든 덕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중세의 아주 깜깜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신앙의 촛불이 최소한 깜박거리고는 있었다. 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특성과 힘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여러 종류의 시도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즉 칠죄종(七罪宗: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오만 탐욕 사음 노여움 탐식 질투 나태 등을 이른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섯 가지 죄가 교회를 냅다 쳐들어왔다. 이것들을 이런 모양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탐욕은 약탈 포대기를 싣고 달리는 말로 묘사된다. 탐식은 맛있는 음식을 통째로 삼키는 짐승으로 표현된다. 사치는 온갖 모양을 내느라 여념이 없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남자도 이 짓을 했다. 노여움은 연약한 처녀의 머리를 칼로 내리치려는 걸로 묘사된다. 교만은 자기 말에서 굴러떨어져 채이는 그림으로 나타난다. 약탈 포대기를 나를는 탐욕 교회의 탐욕은 국가와 아주 심하게 마찰을 빚었다. 국가도 역시 탐욕 덩어리였다. 싸움을 하면서 교회는 더욱 탐욕스러워져 갔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부자가 되었고 왕들은 질투로 배가 아파 몸살을 앓았다. 특별히 영국과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고 있는 참이라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면 누구에서도 그걸 얻거나 뺏을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5.6공 시절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고나 할까. 영국 왕은 교회 재산 축적에 도움을 줬고 프랑스 왕은 자기 나라의 어떤 돈도 로마로 보내는 걸 아주 싫어했다. 이에 발끈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는 교회의 재산을 뺏어 가는 어떤 왕도 왕한테 교회 재산을 바치는 어떤 성직자도 출교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아주 시덥잖다는 표정으로 교황을 생포해 프랑스의 한 궁벽 진 촌락으로 교황청을 이전시킴으로써 교황의 으름장에 답했다. 그 촌락 이름이 아비뇽이었다. 교황들이 7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로마에 부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305-1377) 이 시기를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기간을 본 따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라고 한다. 2022-02-08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2-0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9_ 새로운 수도원 운동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ermon to the Birds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새로운 수도원 운동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시대에 새로운 종류의 수도원운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바람을 탄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떨어져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수도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탁발수도사(friar)니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er에서 온 말이다. 탁발수도사들은 함께 모임을 갖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백성들과 함께 보냈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지도자는 프란체스코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마을 아시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 상인이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는 통설과 달리 프란체스코는 부자가 되기를 꺼렸다. 세상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사람들이 부를 얻고자 몸부림치며 싸우는 데서 비롯된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그리고 교회의 어려움은 수도원들이 너무 부유해지고 너무 편안해져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가난 양』(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결코 가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는 화폐 가치가 있는 선물은 어떤 것도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는 입을 옷과 먹을 음식만 받았다. 그는 노동을 했지만 입고 먹는 것 이상의 임금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최상의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악의 것을 위해서 구걸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입으려고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빌었다. 또한 그는 내일의 것이 아니라 그날에 필요한 오늘의 것만을 위해 구걸했다. 그는 몸의 건강조차도 자신의 소유에 속한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나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기꺼이 찾아갔다.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들이건 도시건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우리 찬송가 가사따나 아골 골짝 빈들에도 그는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도시들이 성장을 거듭하는 시기였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모본을 따라 사는 실체를 몸소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물건 소유를 포기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소유한 부유함을 느꼈다.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에 나타난 흔적들을 스티그마타 즉 성흔이라고 한다. 스티그마타(stigmata)의 복수형이다. 그 흔적들은 붉은 반점들인데 프란체스코가 그리스도의 상처들을 너무도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tigmatization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는 날아다니는 새들을 앉혀 놓고 행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은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방주 속에서 구원해 주셨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을 너희한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너희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둥지를 만들어 살라고 너희에게 큰 나무들을 주셨다. 너희는 누에를 치지도 않고 목화를 심지도 않았는데 너희에게 털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므로 작은 자매들이여,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도록 해라』 2022-01-2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1-2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8_ 교회교육
    논쟁하는 학자들 교회교육 언제는 쇠뜨기 풀이더니 이제는 소금이 유행이다. 건강에 소금물 복용이 그만이란다. 그것에 관한 강습회도 있고 가르침대로 따랐더니 효과를 봤다고 여기저기 퍼치는 소금 전도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에 반해 정신건강을 위한 방법 개발에는 늘 잠잠하다. 정신이 저마다 건강해서인지 아니면 생명 연장에 정신건강이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다. 우리네 정신건강은 실로 나쁘기 그지없다. 검사가 검사한테 잡혀가 구속당하고 목사가 목사의 고발로 구치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전직 대통령들은 외출도 못하고 자기들 보호를 위해 발사된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학들은 부정입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돈으로 해결하려고 사람들은 돈돈 하겠지… 아이를 체벌하는 수도사 배우고자 소년들이 선생인 수도사한테 몰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록이 있다. 소년들: 선생님 저희 어린이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저희를 가르쳐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선생: 배울 때 매도 맞아야 할텐데? 소년들: 무식하기보다는 매 맞는 게 차라리 낫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괜히 매를 때리지 않으신다는 걸 저희는 알고 있어요. 선생: 너희는 무슨 일을 하니? 첫 번째 소년: 전 수도사가 될래요. 하루에 일곱 번씩 형제들하고 노래를 불러요. 그 사이에 라틴어를 배우고 싶어요. 선생: 이 친구들은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니. 첫 번째 소년: 농부도 있고 양치기도 있고 소치기도 있고 사냥꾼도 있어요. 그리고 어부, 행상, 상인, 구두 만드는 사람, 빵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선생: 농부 너는 무슨 일을 하니? 농부: 아주 고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새벽에 소를 몰고 밭에 나가 쟁기질을 합니다. 날마다 2천 평 이상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소년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받는다. 소년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최고라고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선생: 자 조용히들 하려무나. 각자 서로를 도와주어라. 자기 일을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사제이든 수도사이든 평신도이든 군인이든 누구라도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 일에 힘쓰고 분수를 지키도록 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점잖게 행동해라.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서서 같은 음으로 찬송을 하고 죄 용서를 구하도록 해라. 교회는 어린 소년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학생들도 가르쳤다. 교회의 주도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한 대학교들이 설립됐다. 대학교는 하나님에 관해 가르쳤고 우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법학과 의학도 가르쳤다. 대학교 선생들은 석사나 박사로 불리웠다. 그들은 서로 논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폈다. 학자의 논쟁이 줄어들고 눈치 보기만 한껏 늘어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단이 기승을 부리고 목회자들은 괜한 일에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닌다. 2022-01-18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1-18
  • 성경이 삶이 되다_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주신 말씀_ 민수기 6: 24~27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화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몇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 14: 22) 위 말씀은 가데스바데아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선발된 정탐꾼 열두 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한 후 돌아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제사장 나라’ 계약을 파기하고 애굽의 노예로 살기를 선택하자 하나님이 보이신 분노의 말씀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열 하루면 가고도 남을 가나안 땅을 40년을 돌아서 가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한 출애굽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은 40년간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주셨고 저들의 의복을 헤어지지 않게 하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항상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게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은혜와 영광을 보면서도 쉽게 믿음에서 약해지고 약속을 잊어버리는 인생! 그는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내 인생 모든 날은 차치하고 근래 3년간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이적과 은혜만은 단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되리라! 아멘. 2022-01-1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1-16

실시간 이야기 세계 교회사 기사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3 - 혼자 사는 사람
    Saint Jerome, who lived as a hermit near Bethlehem, depicted in his study being visited by two angels (Cavarozzi, early 17th century) 혼자 사는 사람 세상은 좋아졌다. 카드로 물건을 사고 전화를 건다. 동전을 넣으면 팔팔 끓는 차가 나오는가 하면 라면으로 끼니도 이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가 귀해서 친구들끼리 봉고차를 빌려 여행을 갔었다. 뜨거운 여름 여행길에 탈탈거리는 차라도 빌려 가는 게 얼마나 가슴 뿌듯했던지. 비포장도로에서 몽땅 내려 밀고 땡기고 하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때 그 친구들 가운데 자기 차 안 가진 사람 없고 듬직한 소나 탄다는 소나타를 가진 친구도 있다. 세상은 이제 혼자 살기에도 그만이다. 옛날 청승스럽게 사내가 빨래판을 문지르거나 대야를 밥상마냥 모시지 않아도 된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가루비누를 흩뿌린 다음 스위치를 누르면 거의 마르다시피 해서 빨래감이 나온다. 웬만한 옷은 탈탈 털어 입어도 좋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문명의 이기들에 둘러싸여 혼자 사는 현대인들이 늘고 있다. 세계가 기독교화 될 때의 교역자들이 원로원의원 마냥 으시대는 귀족이 되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부리는 신하처럼 유배시킨다면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 것일까? 양미간을 좁히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을 떠나시오. 사막으로 가시오. 세상을 벗어나시오. 도시에서 도망가시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시편을 노래하는 논과 밭이 있는 들로 돌아가시오. 살기로 눈을 번들거리는 황제들과 부패한 교역자들을 피해 도망가시오. 모든 사람을 벗어나 혼자서만 살도록 하시오" In Orlando Furioso, Angelica meets a hermit 이렇게 했던 사람을 은수사니 수도사니 했다. ‘은수사(hermit)’는 사막에서 격리돼 사는 사람을 뜻한다. ‘수도사(monk)’는 혼자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최초의 수도사들은 기실 은수사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은수사는 전적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수도사는 도시와 가족을 떠나 다른 수도사들과 한 무리가 되어 따로 사는 사람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이집트에서 시작됐다. 은수사와 수도사는 세상이 악하고 육체도 악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영지주의자 즉 노스틱 주의자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육체가 악하다면 고행으로 그걸 다스려야 한다고 그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다. Eremitic cave in Spain 이런 이유때문에 그들은 동굴에서 살았고 바위를 요 삼아 잤다. 그리고 그들은 딱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먹었다. 종려 열매와 양상추가 주식이었다. 식사 때 음식이 입에서 떨어질 정도로 잠을 자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악한 육체에 벌을 가하는 셈이었다. 누가 가장 심한 고행을 견딜 수 있는가 견주어 보는 시합도 열렸다. 어떤 수도자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황새처럼 외다리로 서 있었다. 높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가서 장대로 음식을 받아먹고 사는 수도사들도 적지 아니했다. 청년 시절 조계사엘 들른 적이 있었다. 우람한 나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가보니 여느 까까중과는 달리 황색 가사를 걸친 외국인 중이 석가처럼 고목 아래 가부좌를 틀로 앉아 있었다. 그는 고행 승으로 평생을 앉아 지낸다고 했다. 그 앞에는 공양을 드리는 사람들로 줄을 이루고 있었다. 2020-12-2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2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19
  • 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13
  • 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05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9 - 한 머리와 세 얼굴
    Russian icon of the Old Testament Trinity by Andrey Rublev, between 1408 and 1425 한 머리와 세 얼굴 ‘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뭐길래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보상자에 눈길을 모으고 배꼽을 잡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한다. 어제 대발인가 사발인가 하는 청년이 결혼한 데까지 이른 모양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인기작가의 엿가락 같은 이야기 늘림을 어디까지 늘릴런지 사뭇 기대가 된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열 받은 교회들이 모세 앞의 홍해처럼 둘로 좍 갈라졌다. 바로를 피하기 위한 선민의 물 건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국의 통일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교회의 갈라짐이었다. 로마제국의 통치자 콘스탄틴 황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어전을 왔다갔다 했다. 제국의 통일을 공고히 해주어야 할 교회가 갈라서서 성부니 성자니 성령이니 하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싸우다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양상은 황제의 정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어떻게 해서 쟁취한 제국인데 도움을 엄청 주리라 생각된 교회가 오히려 여론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을 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실 콘스탄틴 황제는 삼위일체 논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해되는 게 별로 없었다. 측근들을 통해 설명을 몇 번 들었지만 도무지 장님 코끼리 더듬기였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를 놓고 설왕설래 하느라 눈에 핏발이 서고 목에 힘줄이 돋는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데간데없었다. 논쟁이 뭐길래 교회의 사랑까지 식혀 버리는지. 토론장에 난데없는 폭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드잡이를 하더니 급기야는 치고받았다. 형제요 자매들인 그리스도인끼리 싸우는 꼴을 나비넥타이에 콧수염 기른 김동길 교수가 봤다면 “이게 뭡니까?”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느물거렸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데 그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렵사리 마련된 제국의 안정이 교회 싸움에 깨질런지도 몰랐다. 내란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치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쟁취한 제국이며 황제 자리인가!황제는 뒷짐을 풀었다. 그는 먼저 메신저를 보내 양 파 지도자한테 항의 조의 나무람을 전달했다. 황제는 말했다. “이게 뭡니까? 이 모든 논쟁은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빚은 결과입니다. 말에 담긴 어리석은 차이 때문에 형제끼리 원수처럼 치고받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이 무슨 망발들입니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소?” 하나님은 셋이니 둘이니 하고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며 싸울 때 교인들 사이에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그림이 유행했다. 이 그림에서 삼위일체가 한 머리와 세 얼굴로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의 모퉁이에 있는 날개 달린 네 피조물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사실 너무 단순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해줄 수는 없다. 현대 의학으로도 감기의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의 실체를 어떻게 인간의 말과 그림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Holy Trinity Template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좋아했다. 신학적인 설명이야 어찌 됐든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라고 잘 설명해주니까 말이다. 2020-11-28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28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8 - 삼위일체와 분열
    Holy Trinity, depicted by Szymon Czechowicz (1756–1758) 삼위일체와 분열 통일과 화해를 기대하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삐걱거리고 있다. 복면을 쓰고 쇠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벌건 대낮에 스스럼없이 농부의 아들이 세운 공장을 우우 몰려다닌다. 어린 백성을 정신없는 정신대로 내모는 데 일조를 했던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섬이 없다. 대신에 섬나라 자그마한 정치 지도자가 우리 의원끼리 박터지게 싸우던 국회에 나타나 머리만 조아리다 사라졌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정말 이 겨울에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도 독일처럼 통일이 되어 애국가와 찬송을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끼리 다른 문제도 아닌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관계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너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옥신각신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의 육신을 지니시고 이 땅에 사셨다. 그는 실제로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한테 새 생명을 주셨다. 그럴진대 그는 확실히 노대통령 같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나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신이 두 분이 계시지 않게 되겠는가?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이럴 경우 신이 세 분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영어참고서 제목으로 채택된 바 있는 이 삼위일체 논쟁이 어느 곳보다도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뜨겁게 달구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리우스라는 이름의 연로한 성직자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인간 이상이었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했다고 알쏭달쏭한 주장을 점잖게 폈다. 그런데 같은 교회에서 시무하던 아다나시우스라는 부교역자가 감히 아리우스 감독의 주장이 얼토당토않다고 반론을 폈다. 근간에 위장을 덤덤하게 떼낸 목사님이 한 분 계신데 그는 아다나시우스 같이 바른 말하는 교역자를 좋아하신다. 아마 도망다니던 아다나시우스를 당시 이 목사님이 계셨다면 자신의 교회에 특채해서 거둬 주셨을 것이다. 아마 당신의 의견을 그가 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Ikone Athanasius von Alexandria어쨌든 아다나시우스의 그 당시 반론은 박수는커녕 그를 밤낮으로 도망 다니게 했다. 당시에 삼위일체를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이상이셨고 하나님 이하이셨다면 기실 그는 인간도 아니시고 하나님도 아니시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이도 저도 아닌 얼추 묘한 존재가 되시고 마는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셨다. 하나님의 실재를 완전히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풍성히 공유하도록 도와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게 된다. 성령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 한 분 안에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한 세 분이 계시다. 즉 만유의 주 성부 하나님,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 우리 영혼을 감동 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2020-11-2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22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7_ 제국과 교회
    Byzantine mosaics of the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 제국과 교회 아무리 일해도 배고픈 게 싫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시류에 맞춰 쌀 배달부에서 싸전주인으로, 운수업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해방이 되자 건설회사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끈질긴 빈대처럼 끈기도 있었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빈대처럼 여기저기 빌붙기도 잘했다. 이제 얼굴에 검버섯은 군데군데 피었을지라도 세계가 알아주는 한국 제일의 재벌이 됐다. 새해 벽두에 그가 카랑한 목소리로 정가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말인즉 이승만 대통령의 제2공화국 때는 형편이 여의치를 못했단다. 그렇지만 박정희 장군의 제3공화국 때부터는 제법 돈푼께나 만지게 되었단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우정 높은 분 사시는 청와대에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 인사를 드렸단다. 그런데 재벌이 된 농부의 아들이 돈 보따리를 갖다 바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꽤나 대통령 덕을 많이 봤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집권자가 덕수궁 돌담 옆에 있는 정동교회에 주일마다 꼬박꼬박 출석하는 교인이었다. 그래서 어느 공공기관에서건 기독교의 이런저런 일들에 퍽이나 협조적이었다. 콘스탄틴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꿈으로써 교회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도시는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에 아주 좋은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육로로 유럽과 아시아를 해로로 에게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차점에 있었다. 이를테면 천안삼거리인 셈이었다. 예전에 그 도시를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콘스탄틴은 그걸 자기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했다. 터어키인들은 그걸 이스탄불로 바꿨다. The Byzantine Empire under Manuel I, c. 1180. 그곳은 새 로마로도 불리웠다. 옛 로마는 더 이상 수도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황제도 없었다. 따라서 로마의 교황이 어떤 의미에서 황제의 후계자처럼 되어버렸다. 마침내는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의 감독 실베스터 1세한테 제국의 서쪽 지역 통치권을 하사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 이야기가 사실은 아닐지라도 일말의 진리는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제국의 위치에 버금갈 만치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택한 데는 보다 깊은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사정이 있었다. 사실 권력투쟁을 위해 진군하던 장군 시절에 십자가 환상을 얼핏 보았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가 십자가를 제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거대한 제국 내에서 바글거리며 살고 있는 온갖 잡다한 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종교가 하나 필요했었다. 콘스탄틴의 생각에 아주 급속하게 전파돼 아주 강력하게 성장한 그리스도교야말로 로마제국을 공고히 결합시켜 줄 접합체로 아주 안성마춤이었다. 어떤 시련에도 발전을 멈추지 않고 결속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틀을 다져주는 견고한 시멘트로써 최상의 종교였다. 유능한 정치가요 통치자인 콘스탄틴은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골조공사가 끝나 그리스도교로 옷 입은 로마제국 내에서 정작 시멘트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교가 내부에서 삐걱대며 금가기 시작했을 때 콘스탄틴의 당혹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2020-11-1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1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6_ 웅장한 교회
    View of saint Peter basilica from a roof 웅장한 교회 로스앤젤레스는 연말연시이면서도 햇살은 사뭇 따사로울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바람을 가르며 웃통을 훤히 드러낸 채 길거리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염치없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오아시스로 변한 그 사막의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철골과 유리로 외관을 꾸미고 안에는 분수가 흐르는 크리스털 교회가 있다. 주일이면 옛날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은 목사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강단에 들어선다. 주일날 그곳은 활기와 왁자함과 은은함이 한데 어울려 성공의 믿음을 자아낸다. Christian Chi-Rho on a 5th-century marble table, Quiroga, Galicia. 콘스탄틴 치하에서 로마는 그리스도교 국이 됐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짜 맞춘 문자 PX는 콘스탄틴 군대의 승리 군기가 됐다. 초대 교인들이 대체로 군인이 되기를 거부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입에 침을 튀길 사람도 있을게다. 그 대답은 사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신자는 콘스탄틴이 승리하기를 오매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움을 자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적이 궤멸 됐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며 두 손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콘스탄틴은 직.간접으로 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직접 적으로 그는 옛날에 이교도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들을 교회 목사들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교도사원에 버금가는 권리를 소유하게 됐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공식적인 공휴일이 됐다. 그리스도교 감독은 높은 예우를 받았다. 감독은 원로원 의원처럼 정부의 대형마차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다. 박해 때 파괴된 교회는 이교도의 경비로 재건됐다. 콘스탄틴 황제 자신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세인트 소피아(거룩한 지혜)성당을 비롯하여 새 교회당을 많이 건축했다. 당시 교회를 바실리카라고 했다. 바실리카는 큰 교회당을 뜻한다. 지금 옆에 나와 있는 그림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바실리카)의 평면도이다. 반원형에 표시되어있는 C는 앱시스 라고 한다. 이곳에는 성찬 상 뒤에 감독과 성직자가 앉았다. 성찬 상은 그 위에서 떡과 포도주의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는 믿음이 자라면서 제단으로 통하게 되었다. F는 날개 모양으로 양쪽으로 약간 삐져나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형태를 암시하며 교차랑이라고 한다. A는 교회를 배에 비유 한 데서 비롯된 네이브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본당이다. 이것은 성가대를 위한 통로였다. 사람들은 B라고 표시된 낭하에 앉았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역 자(r) 예배당에서 마냥 남자와 여자가 양편에 따로 갈라 앉았다. D는 뚜껑이 있는 널따란 홀인레 배랑이라고 한다. E는 뚜껑이 없는 홀인데 노천 식인 것은 풀에 빗물을 받기 위한 것이다. 날씨에 따라 예비 신자들이 이들 뜰에 모였다. 이들 초 신자는 신앙이 아직 어려서 성만찬과 교회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바실리카는 아주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했다. 제롬은 이렇게 툴툴거렸다. “바실리카 대 예배당은 엄청난 경비로 건축된다.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고 사이사이에 대리석이 박혔다. 한때 불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과 성경이 이제는 자주 옷을 입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있다.” 2020-11-07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0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5_ 십자가를 짊어진 로마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 십자가를 짊어진 로마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거리는 캐롤로 술렁인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바삐 이곳저곳을 오간다. 소련에서는 상점마다 사람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고 붉은 용의 몸둥아리는 조각조각 흩어졌다. 제주도에서 시끌벅적하게 노대통령과 우정이니 뭐니 하며 돈을 우려내던 고르비도 조만간 구하기 힘든 영광 굴비마냥 역사 속으로 묻힐 모양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의 섧디섧은 박해를 종식시켰다. 콘스탄틴은 근 21년간을 로마황제직에서 몽기작거린 디오클레티안(재위 기간 AD 2백84년~3백5년)을 이은 황제였다. 콘스탄틴은 그냥 권좌에 덜렁 앉았던 게 아니라 오랜 각고의 투쟁 끝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애시당초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안은 한 사람이 통치하기에는 로마제국이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황제였다. 그는 홍당무를 동강내듯 분할 해 부목사같은 보조 황제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당회장 목사 같은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늙고 병들고 은퇴를 고려하게 됐을 때 보조 황제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보조 황제의 아들들끼리도 싸움을 이어받았다. 콘스탄틴은 한 보조 황제의 아들이었고 막세티우스는 다른 보조 황제의 아들이었다. 콘스탄틴은 지금의 영국인 브리튼과 지금의 프랑스인 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와 이태리를 꽉 쥐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로마로 진군했을 때 어떤 표징을 하늘에서 보았다고 한다. 해가 뉘였거리는 석양 무렵이었는데 태양 위에 빛으로 된 십자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이 표징으로 네가 이기리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교회는 콘스탄틴이 하나님은 분명히 아주 강력한 신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로마제국 내에서 당시 아주 막강했다. 콘스탄틴은 이 하나님을 승리의 기대를 안고 섬긴다면 승리는 따논 당상이 아니겠는가 하며 그는 무릎을 쳤다. 콘스탄틴의 생각과 믿음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지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후퇴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게 화근이었다. 티베르 강 위에 설치된 배로 만든 부교들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6.25 당시 한강 다리 꼴이었다. 군사와 말과 수레가 강과 부교 사이에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는 와중에 막센티우스 자신도 익사하고 말았다. 주후 3백1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밀비안 다리의 전투’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 콘스탄틴이 이태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데는 다른 라이벌들과의 힘겨운 투쟁을 십 년 이상이나 겪어야 했다. 콘스탄틴이 힘이 미치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중단됐다. 이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콘스탄틴의 손에 로마제국이 완전히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교는 제국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종교가 되었다. 한 로마 총독의 명령에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의 예수가 로마제국의 구세주로 숭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불로 시련을 받았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와 혜택으로 시련을 받았다. Anastasis Pio Christiano Inv31525 당대의 동전이 그 변화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이교도제국의 동전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짜 맞춘 문자 PX가 으레 덧붙여 새겨지게 되었다. 세상은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2020-11-01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01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4_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9773) 돌아온 탕자 돈 주고 제사 증명서를 번듯하니 소지했던 탕자들을 용서해준 것에 화가 아주 단단히 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러한 온건한 조처는 또 다른 박해 때 생길 실족을 조장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비리비리한 허약한 신자들을 양산해내게 될 터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죽으면 죽었지하고 한사코 반대했던 재건 파 같은 엄격 파가 일반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딴 살림을 차렸다. 배교자를 용납하거나 관용할 수 없는 엄격파는 고개를 돌리고 나름의 교회를 시작했다. 이 교회는 상당 기간 존속했다. 70여 년이 지났다. 이즈음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콘스탄틴 황제가 이 딴살림에 열중해 있는 엄격 파를 카톨릭 교회와 연합시키려고 애썼다. 황제는 도대체 잘못이 무엇인가 물었다. 신앙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실제로 신앙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시련 때 믿음을 지켰던 사람의 자손이 믿음을 헌신짝 버리듯 했던 사람의 자손과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속이 뒤틀린 황제는 엄격 파의 감독에게 냅다 소리 질렀다. “그렇다면 사닥다리를 가져다가 당신들만 천국에 올라가시구려.” 박해와 평화가 신통하게도 50년 주기로 반복됐다. 디오크레티안 황제 때도 박해가 시작됐고 앞의 이야기가 다시 되풀이됐다. 디오클레티안은 교회와 모든 성경 사본까지 없애려고 했다. 이때는 성직자 가운데에도 성서를 파기하는데 앞장선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자 그런 성직자들까지도 교회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일반 그리스도인인 평신도가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직자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박해 때 주님과 말씀을 등한시했던 성직자들도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단 적인 거센 저항의 물결이 북아프리카에서 일었다. 그 교파를 도나투스파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불만이 입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 교파로 우르르 몰렸다. 그들의 성격은 매우 억세고 모질었으며 제멋대로였다. 그들은 교회를 가르고 다른 파의 감독들을 충동질했다. 전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화 된 뒤까지도 도나투스파는 어찌나 골머리를 썩였던지 그 파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사형 형벌이 포고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지만 다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신앙에 손사래를 쳤는가 하면 부인하겠지 했던 사람이 한사코 신앙을 고백하며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을 코웃음 치는 디오클레티안 황제 앞에서 연극이 한 편 공연되었다. 한 배우가 세례를 받기 위하여 하얀 옷을 입었다. 그가 소리쳤다. “너무 무거워” 그는 아픈 듯이 무대에 벌렁 누웠다. 그러면서 말한다.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어” 안타까운 눈빛으로 동료가 말했다. “어쩐다지? 목수처럼 널 대패질 해주랴? 그럼 얇아져 가벼워지지 않겠니.” 하얀 옷의 배우가 질겁하며 외쳤다. “바보 천치 같으니라구. 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에게로 훨훨 날아 올라가고 싶단 말이야.” 황제의 눈이 실쭉해졌다. 2020-10-2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0-24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