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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3_ 개혁의 촛불
    Jan Hus at the Council of Constance. 개혁의 촛불 일본 자동차 공세에 밀려 맥을 못 쓰던 미국 자동차업계를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이아코카였다. 그는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경영 철학과 경험은 세계에 물결을 일으켰다. 미국 내에서의 그의 인기는 너무도 대단해서 그는 워싱턴을 넘보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뉴욕타임즈는 칼럼까지 동원해 미국에 필요한 것은 일류 자동차 제조업자지 이류 정치가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아니 여보게들 아이아코카가 정치를 할 모양이네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영판 정치인 같은 어투로 말하고 있어』 요즘 정치 은퇴를 선언한 사람이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하는 말이 각 일간신문에 계속 실리고 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다. 위클리프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운동은 영국에서 별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보헤미아에서 지지를 획득했다. 그 당시 영국 왕이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을 했었다.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인 그 나라에서 존 후스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처럼 부패한 성직자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성직자들은 화려한 옷에 달린 술을 휘날리며 말을 탔고 은으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곤봉으로 가는 길에 거추장스런 사람들을 쫓았다. 후스는 거침없는 비난들 때문에 이단으로 고소를 당해 콘스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회부 되었다. 후스는 자신이 잘못 가르쳤다는 정죄에 대해 결코 그런 가르침을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경위야 어찌 됐든 후스는 그걸 취소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눈을 껌벅거리며 도대체 결코 가르친 적이 없는 걸 무슨 수로 취소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후스는 거절했고 유죄 판결을 받아 화형당했다. 화형당하는 후스(예나 약전, 15세기 후반) 그 결과 보헤미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고 성직자들의 뺨은 디룩디룩했다. 개혁의 불빛은 아직 희미했지만 여러 구석에서 촛불들이 타고 있었다. 독일 라인강 계곡을 따라 일단의 조용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수도원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접촉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그룹이 홀랜드에 있었는데 스스로를 『공동생활 형제』라고 불렀다. 그들은 늘 함께 살면서 물건을 함께 나누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치는데 보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을 교육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퍼뜨렸다. 특별히 학교와 대학교들을 통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 그룹을 통해 책이 한 권 나왔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성경처럼 읽히고 있다. 이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다. 어떤 형제가 썼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켐피스로 알려져 있다. 개혁의 촛불들이 희구하는 것은 하나님 교회의 사랑과 선의 회복이었다.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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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3-1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그늘
    면죄부 판매 죄의 그늘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단지 교회의 탐욕만을 증가시켰다. 이유인즉슨 돈을 그러모으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청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교황의 오랜 부재로 토지들을 이웃 통치자들이 마구 짓밟아 못 쓰게 만들었다. 아비뇽에 자리 잡은 교황 요한 22세는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옛것이든 새것이든 온갖 짓을 다 했다. 물론 세례, 결혼, 장례 등과 같은 정식 예식에 돈이 부과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둘로 나눠 두 무덤에 매장하는 것조차도 돈만 내면 교회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유럽 어느 곳에 있든 명색이 주교이면 임지를 받을 때 1년 치 봉급을 고스란히 교황한테 바쳐야 했다. 요즈음 학교 선생이 될작시면 이런 꼴같잖은 일이 있다는데 그 옛날 교황한테서 학교 이사장들이 배운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주교직이 공석이 된다면 교황은 얼씨구나 하고 그 자리를 메우려고 다른 주교를 이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연쇄적으로 주교직이 한 자리씩 비게 되어 주교들이 전부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그런 뒤 교황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옮긴 주교들한테서 부임 첫해의 월급을 모조리 상납받게 된다.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면죄부를 파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죽은 사람이 연옥에서 괴롭게 지내야 되는 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교황의 허가증이었다. 그 사상은 연옥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성자들의 공로를 보관한 보물창고를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 증서는 타인에게 양도도 가능했다. 가난과 결혼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요한 22세와 같은 탐욕 덩어리 교황한테 지청구를 늘어놓고 교황을 이단이라고 몰아댔을 때 분노의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교황은 화가 지글지글 끓어올라 본보기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몇을 이단 심문관에게 넘겨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군주들이 이탈리아의 교회 소유 토지를 탈취해가자 교황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정말 힘써 그러모은 돈을 태반이나 전쟁터에서 허비했다. 교황은 교회가 교회답게 행해야 될 일에는 쓸 돈이 거의 없었다. 또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런데 쓸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70여 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뒤 사치와 교만의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성직자들은 아주 품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교회당과 그림과 책에 솔찬한 돈을 썼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잔치에 아주 많은 돈을 활수 하게 지출했다. 그들은 값비싼 의상을 걸쳤고 예배 행렬을 화려하게 꾸몄다. 교황은 강력함을 내보이려고 멋진 의자를 군인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게 했다. 평신도들은 고등종교의 신앙에서 낮은 마법의 주술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성만찬을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마법의 부적처럼 사용했다. 기독교에 만연된 치명적인 죄와 마법이 교회의 생명을 비칠거리게 했다. 사치의 죄에 빠진 교회 개혁의 외침과 시도들이 유럽 전역에서 불끈거리며 나왔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 어두운 만큼 밝은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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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2-28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교회 침범
    서방교회의 분열을 상징화한 14세기의 세밀화 죄의 교회 침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교황권을 튼튼하게 세운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도 죽고 교회와 세상에 신선하고 감동적인 영향을 미친 프란체스코도 죽었다. 이 세상은 악인만 죽는 게 아니라 의인도 덩달아 죽기 마련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 그런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쓰러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거듭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될 텐데. 어쨌든 이노켄티우스 3세와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중세는 내리막길을 마구 달렸다. 일단 지어진 대 예배당은 변함없는 매력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돌로 된 건물은 비바람으로 인한 마모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지닌 인간은 자기 특성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교회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을 침범했던 야만인들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교회에 끼쳤다. 그러나 야만인들이 로마인을 죄다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그 죄들이 교회의 모든 덕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중세의 아주 깜깜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신앙의 촛불이 최소한 깜박거리고는 있었다. 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특성과 힘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여러 종류의 시도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즉 칠죄종(七罪宗: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오만 탐욕 사음 노여움 탐식 질투 나태 등을 이른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섯 가지 죄가 교회를 냅다 쳐들어왔다. 이것들을 이런 모양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탐욕은 약탈 포대기를 싣고 달리는 말로 묘사된다. 탐식은 맛있는 음식을 통째로 삼키는 짐승으로 표현된다. 사치는 온갖 모양을 내느라 여념이 없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남자도 이 짓을 했다. 노여움은 연약한 처녀의 머리를 칼로 내리치려는 걸로 묘사된다. 교만은 자기 말에서 굴러떨어져 채이는 그림으로 나타난다. 약탈 포대기를 나를는 탐욕 교회의 탐욕은 국가와 아주 심하게 마찰을 빚었다. 국가도 역시 탐욕 덩어리였다. 싸움을 하면서 교회는 더욱 탐욕스러워져 갔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부자가 되었고 왕들은 질투로 배가 아파 몸살을 앓았다. 특별히 영국과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고 있는 참이라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면 누구에서도 그걸 얻거나 뺏을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5.6공 시절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고나 할까. 영국 왕은 교회 재산 축적에 도움을 줬고 프랑스 왕은 자기 나라의 어떤 돈도 로마로 보내는 걸 아주 싫어했다. 이에 발끈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는 교회의 재산을 뺏어 가는 어떤 왕도 왕한테 교회 재산을 바치는 어떤 성직자도 출교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아주 시덥잖다는 표정으로 교황을 생포해 프랑스의 한 궁벽 진 촌락으로 교황청을 이전시킴으로써 교황의 으름장에 답했다. 그 촌락 이름이 아비뇽이었다. 교황들이 7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로마에 부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305-1377) 이 시기를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기간을 본 따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라고 한다.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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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2-0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9_ 새로운 수도원 운동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ermon to the Birds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새로운 수도원 운동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시대에 새로운 종류의 수도원운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바람을 탄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떨어져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수도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탁발수도사(friar)니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er에서 온 말이다. 탁발수도사들은 함께 모임을 갖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백성들과 함께 보냈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지도자는 프란체스코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마을 아시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 상인이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는 통설과 달리 프란체스코는 부자가 되기를 꺼렸다. 세상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사람들이 부를 얻고자 몸부림치며 싸우는 데서 비롯된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그리고 교회의 어려움은 수도원들이 너무 부유해지고 너무 편안해져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가난 양』(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결코 가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는 화폐 가치가 있는 선물은 어떤 것도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는 입을 옷과 먹을 음식만 받았다. 그는 노동을 했지만 입고 먹는 것 이상의 임금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최상의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악의 것을 위해서 구걸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입으려고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빌었다. 또한 그는 내일의 것이 아니라 그날에 필요한 오늘의 것만을 위해 구걸했다. 그는 몸의 건강조차도 자신의 소유에 속한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나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기꺼이 찾아갔다.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들이건 도시건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우리 찬송가 가사따나 아골 골짝 빈들에도 그는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도시들이 성장을 거듭하는 시기였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모본을 따라 사는 실체를 몸소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물건 소유를 포기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소유한 부유함을 느꼈다.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에 나타난 흔적들을 스티그마타 즉 성흔이라고 한다. 스티그마타(stigmata)의 복수형이다. 그 흔적들은 붉은 반점들인데 프란체스코가 그리스도의 상처들을 너무도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tigmatization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는 날아다니는 새들을 앉혀 놓고 행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은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방주 속에서 구원해 주셨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을 너희한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너희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둥지를 만들어 살라고 너희에게 큰 나무들을 주셨다. 너희는 누에를 치지도 않고 목화를 심지도 않았는데 너희에게 털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므로 작은 자매들이여,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도록 해라』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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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1-2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8_ 교회교육
    논쟁하는 학자들 교회교육 언제는 쇠뜨기 풀이더니 이제는 소금이 유행이다. 건강에 소금물 복용이 그만이란다. 그것에 관한 강습회도 있고 가르침대로 따랐더니 효과를 봤다고 여기저기 퍼치는 소금 전도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에 반해 정신건강을 위한 방법 개발에는 늘 잠잠하다. 정신이 저마다 건강해서인지 아니면 생명 연장에 정신건강이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다. 우리네 정신건강은 실로 나쁘기 그지없다. 검사가 검사한테 잡혀가 구속당하고 목사가 목사의 고발로 구치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전직 대통령들은 외출도 못하고 자기들 보호를 위해 발사된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학들은 부정입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돈으로 해결하려고 사람들은 돈돈 하겠지… 아이를 체벌하는 수도사 배우고자 소년들이 선생인 수도사한테 몰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록이 있다. 소년들: 선생님 저희 어린이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저희를 가르쳐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선생: 배울 때 매도 맞아야 할텐데? 소년들: 무식하기보다는 매 맞는 게 차라리 낫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괜히 매를 때리지 않으신다는 걸 저희는 알고 있어요. 선생: 너희는 무슨 일을 하니? 첫 번째 소년: 전 수도사가 될래요. 하루에 일곱 번씩 형제들하고 노래를 불러요. 그 사이에 라틴어를 배우고 싶어요. 선생: 이 친구들은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니. 첫 번째 소년: 농부도 있고 양치기도 있고 소치기도 있고 사냥꾼도 있어요. 그리고 어부, 행상, 상인, 구두 만드는 사람, 빵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선생: 농부 너는 무슨 일을 하니? 농부: 아주 고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새벽에 소를 몰고 밭에 나가 쟁기질을 합니다. 날마다 2천 평 이상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소년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받는다. 소년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최고라고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선생: 자 조용히들 하려무나. 각자 서로를 도와주어라. 자기 일을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사제이든 수도사이든 평신도이든 군인이든 누구라도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 일에 힘쓰고 분수를 지키도록 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점잖게 행동해라.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서서 같은 음으로 찬송을 하고 죄 용서를 구하도록 해라. 교회는 어린 소년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학생들도 가르쳤다. 교회의 주도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한 대학교들이 설립됐다. 대학교는 하나님에 관해 가르쳤고 우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법학과 의학도 가르쳤다. 대학교 선생들은 석사나 박사로 불리웠다. 그들은 서로 논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폈다. 학자의 논쟁이 줄어들고 눈치 보기만 한껏 늘어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단이 기승을 부리고 목회자들은 괜한 일에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닌다.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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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1-18
  • 성경이 삶이 되다_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주신 말씀_ 민수기 6: 24~27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화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몇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 14: 22) 위 말씀은 가데스바데아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선발된 정탐꾼 열두 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한 후 돌아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제사장 나라’ 계약을 파기하고 애굽의 노예로 살기를 선택하자 하나님이 보이신 분노의 말씀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열 하루면 가고도 남을 가나안 땅을 40년을 돌아서 가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한 출애굽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은 40년간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주셨고 저들의 의복을 헤어지지 않게 하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항상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게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은혜와 영광을 보면서도 쉽게 믿음에서 약해지고 약속을 잊어버리는 인생! 그는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내 인생 모든 날은 차치하고 근래 3년간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이적과 은혜만은 단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되리라! 아멘.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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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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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4_ 십자군 전쟁
    Combat deuxième croisade 십자군 전쟁 남자들만큼 싸움을 즐기는 생명체가 이 지구상에 그닥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죄와 벌』에서 한 인물을 통해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게 한다. 『사람을 하나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범인이 되지만 많이 죽이면 영웅이 되어 존경을 받게 된다.』 우르바누스 2세가 아돌프 히틀러 마냥 선동적인 연설을 한 그해 겨울 전쟁준비가 본격 가동됐다. 김일성 노인네가 누구를 겁주고 죽이려고 원자탄을 만드는지 모르지만 유럽의 공격 목표는 확실했다. 대장장이의 둔중한 망치 소리가 달궈진 쇠를 땅땅 내리쳤다. 흠씬 두들겨 맞은 쇠들은 칼과 방패와 갑옷과 말등자로 변해 번들거렸다. 여러 지역에서 군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군대는 여러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방으로 진군했다. 때아닌 무기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드디어 1099년 예루살렘을 기독교도들이 탈환했다. 이교도와 무신론자들은 무참히 살육됐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 거리는 피로 흥건히 젖어 흐를 정도였다고 한다. 1099 jerusalem 십자가를 색실로 팔소매에 아로새긴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께서 매장됐다고 여겨지는 곳에 세워진 홀리 세펄커(성묘) 교회에서 환호성을 올리며 승리의 예배를 드렸다. 로마 교황청에서 승리를 보고 받은 교황은 감사미사를 장엄하게 드렸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교황의 강력한 권위에 새삼 고개를 숙이고 경배했다. 그런데 막상 성지를 점령하고 보니 빼앗는 것 보다 다스리고 장악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괘씸한 터키인들은 심심하면 침략을 일삼았다. 새로운 십자군 원정군이 편성됐다. 이때 용맹을 떨친 인물이 바로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 해서 사자왕으로 불린 영국 왕 리처드였다. 그러나 첫 번째 십자군 원정과 달리 그 뒤의 십자군 원정은 오랜 성공을 거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기면 단시일에 끝나는 승리였다.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세 번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 유럽에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코맹맹이 프랑스 소년이 홀연히 나타나 놀라운 말을 해댔다. 이를테면 그는 계시받은 소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내게 나타나시어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애들이 성취해야 한다. 어른들의 칼과 강한 오른팔을 믿지 말고 십자군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고 바다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해줄 만군의 여호와를 믿으라. 이 약속을 사람들한테 전해 믿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나는 받았습니다.』 스데반은 순례자들이 붐비는 곳에서 연단을 세우고 프랑스 소년들에게 새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라고 외쳤다. 어린애들은 무슨 신나는 놀이라도 생긴 양 모여들었다. 수천을 헤아렸다. 부모들은 막무가내로 집을 나서는 아이들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부모들은 기가 막혀 한숨만 쉬거나 망연히 먼 하늘만을 응시했다. 이 소동은 유럽 전역을 들끓게 했다.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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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2-1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3_ 우르바누스 교황
    Chatillon Urbain2 우르바누스 교황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고 부활 찬송을 연습할 즈음이면 아지랑이처럼 떠오르는 교수님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은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셨다. 어둑해지면 호롱불을 밝혀야 했고 교통도 불편한 후미진 곳에 자리한 신학대학 시절이었다. 밤이면 양쪽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개구리가 합창을 해대던 목가적인 때이기도 했다. 바닥 처리가 안 돼 시멘트가 툭툭 불거진 강의실에 안경을 이마에 걸친 철학 교수께서 들어오셨다. 그 날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 주간 금요일이었다. 그는 빤히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찬송을 몇 곡 불러달라 하셨다. 지휘자도 없이 부르는 학생들의 찬양은 성가대를 능가하는 화음으로 교실을 메웠다. 고난 찬송이 끝나자 그는 수난 성구를 몇 군데 읽으셨다. 그런 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경을 벗어들고 학생들을 향했다. 『여러분,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날 우리가 실존주의니 하이데거니 뭐니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철학박사이고 장로이기도 한 교수님은 조용히 교실을 떠났고 학생들은 말 없는 감동으로 가라앉았다. 우르바누스라는 이름의 교황이 교회 역사에 솔찬히 많지만 개중에 우르바누스 2세가 걸출하다. 마치 옛날 왕의 아버지한테 주어지던 칭호로 대원군이 있었는데 유독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으로 가장 유명한 것처럼 말이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우르바노 2세 1088년 3월 12일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2세는 능변이었다. 그는 교황의 위신과 영향력을 크게 고양시킨 귀족 혈통의 성직자였다. 프랑스인이기도 한 우르바누스 교황은 1095년부터 태양처럼 빛나게 되었다. 1095년 프랑스 크레르몽에서 교회회의가 열렸다. 그는 한껏 위의를 갖추고 프랑스로 가서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로 가득 메운 회의장에서 명연설을 했다. 선동적인 연설에서 그는 터키인들의 잔학한 행위를 실감 나게 묘사했다. 『저주받은 종족이 동방 땅을 침략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삼고 고문을 하고 살해했습니다. 검사들은 목이 단칼에 베어지는지를 시험해보려고 성도들을 연습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교회들을 마구간으로 삼거나 파괴하거나 회교도 기도소로 만들었습니다. 찬양받으실 성모마리아 교회가 저주받은 족속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무기와 군대로 여러분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한테 보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교만으로 배가 불러 서로 으르렁거리며 조각조각 물어뜯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걸 떨치고 그리스도를 수호하러 나아갑시다. 반목과 적의는 잊어버리십시오. 무신론자들과 싸웁시다. 여러분 앞에는 거룩한 전쟁으로 인도하는 기수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보이지 않는 기수와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의연하게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모든 청중은 일제히 소리쳤다.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신다.』 유럽에 짙은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웠다. 거룩한 전쟁, 십자군 원정이 시작됐다. 십자군 원정(crusade)이라는 말은 십자가(cros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소맷자락을 색실로 십자가를 수놓았기 때문이다. 2021-12-0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2-0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2_ 하나님의 휴전
    하나님의 휴전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심판 날이 얼마나 신날지 실감이 난다. 심판 날은 구원 받은 자건 그렇지 못한 자건 다 같이 두렵고 떨릴 줄 알았는데 양자의 느낌이 다를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즉 심판 때 구원 받은 자는 작금 돈 없는 사람처럼 신나고 멸망 받을 자는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신문에 부정축재로 이름이 거명되는 사람처럼 치욕스럽고 당혹스럽고 두려울게다. 어쨌든 신문에 게재되는 고위 공직자들의 흉물스럽고 의뭉한 부정부패의 치부는 치미는 걸 삭이지 못할 정도이지만 신명 나는 건 어쩜인지 모르겠다. 어느 웃기는 사람 말마따나 잘 돼야 할 텐데.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이 나서서 하시는 일이니 이 땅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해달라고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고위 성직자의 업적들은 중세 교회의 명예이다. 고위 성직자는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것은 인간 생활에 용기와 소망을 주었고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인도했다. 교회가 완전히 선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으로 지혜롭지도 않았지만 그 어떤 사회나 세력도 그렇게 열심히 인간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많이 일하지도 않았다. 교회는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귀족들은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서로 싸웠고 다른 제후의 땅을 황폐하게 했고 상대방의 성을 무차별 파괴했고 그리고 상대방의 종들을 개 끌듯 끌고 갔다. 그러한 관행을 중단시키기가 무척 힘들었다. 교회는 전쟁의 폐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애썼다. 하나님의 평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전투를 어느 특정한 지역들 안에서는 억제해야 할것을 요구했다. 성지를 여행하는 순례자 교회 건물들에 대해서 어떤 공격도 해서는 안되며 성직자, 순례자, 상인, 여인과 농부 등에 대해서도 공격을 해서는 안된다. 또한 가축과 농사 기구를 손상시켜서도 안된다. 이 계획이 아주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교회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교회는 일정 기간 모든 전투를 중지시키려고 했다. 이 계획을 하나님의 휴전(the Truce of God)이라고 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일체의 싸움을 멈춰야 한다. 또는 한 해의 어떤 특정한 절기, 예컨대 성탄절 한 달 전인 강림절이나 부활절 40일 전인 사순절 등에도 적용됐다. 물론 이 계획도 아주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교황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싸운다면 산자끼리 서로 치고 박고 할게 아니라 그런 힘을 신앙의 적들에게 돌리는 방책을 강구 했다. 괘씸하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도 많고 마누라도 많은 모하메드를 따르는 신앙을 받아들인 터키를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터키는 예수님이 사셨고 죽으셨던 성지를 침략했었다. 성지를 여행했던 순례자들은 터키인들이 거룩한 장소들을 제멋대로 취급하는 걸 보고 분함과 애통함을 삭일 길 없었다. 중세 유럽은 민족주의나 국경이나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 주된 관심사는 신앙이 문제였다. 그런데 야만적인 터키인들이 개화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의 신경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유럽에는 일기예보가 점차 흐려지게 되었다. 2021-11-29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2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1_ 유럽의 지배자
    Pope Innocent III wearing a Y-shaped pallium 유럽의 지배자 봄이 왔으니 산에 들에 꽃이 피겠지. 교회들은 저마다 사순절 맞이에 골머리를 썩힐 게다. 나랏님은 갱제인지 경제인지 하는 문제아의 소생을 위해 부활절이 다가오는 근자에 마음을 비운 자세에서 빈머리를 돌리고 있으실 게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셨으니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높은 자리의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말씀으로 채워져 변화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 나라에는 무엇보다 양심과 도덕성 회복이 훨씬 중요해 보이는데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상것들은 영판 생각이 다르다. 증권 값이 빨간 막대로 하늘을 찌르고 용인지 미꾸라지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게 되어 공장과 자동차에서 내질러대는 매연을 헤집고 다니는 게 신나 보이는 모양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믿음과 사랑과 상식이 통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데에는 높은 분들의 관심이 그닥 많은 것 같지 않다. 헨리 2세의 눈에는 시건방지게 보여 목이 뎅겅 달아난 토마스 베케트는 성스러운 순교자가 되었다. 순례자들이 순교자의 무덤에 줄을 잇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순례자들은 먼 길의 무료함을 달랠 요량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이야기들을 시인 초오서가 운문으로 엮어 캔터베리 이야기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며 겪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어 이웃이 잘돼 배가 아프거나 세속 축복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잠 안올 때 읽으면 좋을성 부르다. 하여튼 별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얼마나 많이 이 순교자의 무덤을 찾아오는지 캔터베리 대성당에 깔린 돌마루가 다 닳아 반들거리다 못해 곧 땅바닥이 드러날 지경인 모양이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알비 십자군을 통해 카타리파를 평정하였다. 제국과 유럽의 올망졸망한 나라들을 다루는데 교회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때는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 치하의 13세기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어떤 왕이나 황제라기보다는 거의 유럽의 주인에 버금갔다. 유럽은 그의 말 한마디에 왔다 갔다 했다. 군대도 없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지니는 말의 권능만으로 굳이 무기라고 해야 출교와 금령만으로 이노켄티우스 3세는 왕국들을 수여하기도 했고 빼앗기도 했다. 대륙에서 교황의 말은 곧 법이었다. 블란서 왕에게 시실리를 주는 교황 영국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존 왕이 자기 사람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은 발끈했다. 교황은 영국에서 가장 고결한 인물 스테픈 랭턴의 선출을 강력히 주장했다. 심사가 뒤틀린 존 왕은 하나님의 위력과 이름을 들먹이며 이를 앙다물고 맹세했다. 『영국에 있는 이태리 녀석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눈을 뽑아버리고 코를 베어버리겠다. 내가 누구라는 걸 보여주겠어. 교황이 뽑은 녀석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받아들이느니 모든 주교들과 수도사들을 싸그리 내 땅에서 몰아내고 말테다.』 교황은 영국에 대해 금령을 명했다. 성찬을 못 받게 된 왕은 손들고 말았다. 다시는 반항하지 않겠고 교황청에 매년 솔찬한 돈도 내겠노라 약속했다. 교회는 많은 과오와 실패를 범하긴 했지만 중세 세계의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 202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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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22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0_ 법정
    켄터베리의 순교자 토마스 법정 세상 관행은 권력의 끈이 이어지면 바빠지고 끄나풀이 떨어지면 적막감에 싸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요즈막엔 장로 대통령을 싸고도는 사람들은 얼싸절싸 몰켜 다닌다. 늘 푸르고 키가 큰 월계수처럼 변함없이 힘을 떨치자며 월계수회를 만든 사람은 생일을 당했는데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단다. 세상인심 괴이쩍기 그지없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땅콩농장에 돌아왔을 때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자 주위에 아무도 없는 적막감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회상하고 있다. 일천만 이상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 텃밭을 가꾸며 사는 게 소원이라 수단껏 그 기반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 좋은 시장을 일주일 하다 그만둔 교회 집사가 있다. 공기 좋은 우면산 기슭에서 텃밭도 한가로이 못 가꾸게 됐고 다락도 폐쇄됐고 입만 불쑥 튀어나오게 됐다. 그리고 어깨춤을 추며 감사헌금까지 냈는데 한 주일 지난 뒤에는 위로 예배를 굴삭기로 잔디를 갈아엎은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니 쯧쯧, 주여 굽어살피소서. 교회와 국가가 티격태격할 일은 법정 문제에도 있었다. 교회는 자체 법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법정을 들락거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다. 그 이유땜새 그런 관행이 점점 자라나 주교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게 만들었고 교회법이라는 법체계가 주교들의 판단을 이끌게 되었다. 국가 역시 계속해서 법정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가 힘을 합쳐 사이좋게 일할 때 어느 쪽 법정이 어떤 문제를 처리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그닥 까탈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일상적인 협약에 따라 교회는 과부들, 미성년의 고아들, 결혼 등에 관한 사건들을 다루었다. 그런데 교회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성직자는 어떤 사건이든지 불문곡직하고 교회 법정에서만 재판을 받아야 된다고 공포했기 때문에 국가와 분쟁이 생겼다. 왕은 주장하기를 아무리 성직자라도 죄를 범했다면 그 누구를 무론하고 지엄한 나라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14th-century depiction of Becket with King Henry II 이 알력은 영국에서 곪아 터졌다. 영국 왕 헨리 2세는 교회에 압력을 넣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자신의 오랜 동지 토마스 베케트를 뽑도록 채근했다. 왕도 생각하기를 토마스가 자기 말을 고분고분 잘 따라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다. 노래 잘하고 놀기 좋아하고 붙임성 있는 이 왕실 시중꾼은 주교가 되자마자 안면을 싹 바꿨다. 그는 교회를 옹호하는 완강한 투사로 변했다. 왕은 화가 날대로나 분을 삭이지 못해 치를 떨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침을 튀겨 가며 백담사 시절의 머리 벗겨진 사람처럼 툴툴댔다. 『나한테 밥을 얻어먹은 녀석이 나한테 발길질을 해. 내 궁정에 들어올 때는 절름발이 망아지 마냥 설설 기더니 지금은 왕처럼 으스대는 꼴이라니. 그래 이런 고이얀 사제를 혼구멍 내는 신하가 한 놈도 없단 말이냐?』 이 말을 전해 들은 네 명의 우락부락한 기사들이 달려가 캔터베리 예배당에서 토마스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을 흉흉하게 했다. 사세가 불리해진 왕은 순교로 성자가 된 토마스의 무덤에 달려가 참배를 해야만 했다. 2021-11-1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1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8_ 물레방아 세상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토스카나의 마틸데, 클뤼니의 후고. (1115년) 물레방아 세상 야당 시절 닭장차 신세도 심심치 않게 졌던 신임대통령은 취임식 단상에서 성역 없는 부정부패 척결을 외친다.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부정부패 척결 대상자들도 멋모르고 힘껏 손을 마주친다. 야당인이었던 사람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 시절 야당은 여전히 야당이고 그 시절 여당은 묘하게도 여당인 채 정권이 교체됐다. 그래도 정권교체는 교체인지 온고지신을 좋아하는 강토에 신한국을 외치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물레방아가 왜 도는지를 몰라 내력을 물어보겠노라고 노래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물레방아가 왜 도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세태가 왔다. 이리저리 칡넝쿨처럼 엉켜 빌붙어 살던 사람들에게 얼굴 뜨거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제 시대에도 자유당 시절에도 군사정권 밑에서도 살아남은 그 끈기로 이번 시련에도 살아남으려고 버둥질을 치겠지. 엽전들이 짤랑거리며 사는 세상만큼 재미있는 곳이 있을까 싶다. 법을 전공한 사람이라 법무부 장관이 된 사람의 딸이 한국인임에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유가 참으로 갸륵하다. 미국대학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여자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참으로 이 하늘 아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대학을 가지 않고 한국제품을 이용해 준데 대해 상은 주지 못할망정 학교를 자퇴시키고 이 비좁은 땅의 국적을 다시 얻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신한국을 외치는 신명 나는 판국에 말이다. 추운 12월에 독일 황궁을 떠났던 헨리 4세는 추레한 모습으로 카놋사 성문에 나타났다. 벌써 시절은 해가 바뀐 1077년 정월이었다. 눈이 땅에 아직도 희끗희끗 남아 있었다. 참회자로서 흰옷을 입고 맨발로 헨리 4세는 성문 앞에 하루종일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카놋사 요새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둘째 날 헨리 4세는 눈 위에 맨발로 서 있었다. 성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삭풍이 부는 가운데 지리한 침묵만 감돌았다. 셋째 날 헨리 4세는 다시 성문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멍청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느물스러운 베드로의 후계자라도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거절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드디어 성문이 신음을 토하듯 끼이익 열렸다. 강력한 황제가 체수 적고 다리가 밖으로 휜 교황 앞에 굽신거리며 탄원자 자세로 서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황제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약속을 해댔다. 교황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용서했다. 세상은 물레방아 같다. 판세가 금새 변했다. 다시 한번 나라를 장악하게 된 황제는 약속들을 저버렸다. 교황은 다시 그를 출교시켰다. 그러나 황제는 이번에는 교황이 너무 지나치다고 백성을 설득했다. 여론의 지지를 업은 황제는 군사를 동원해 로마로 진군했다. 그는 탄원자가 아니라 정복자로 당당하게 교황은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옹립했다. 교황을 혼내는 황제 종내 또 다른 교황과 또 다른 황제는 싸움의 불씨가 된 문제를 종식 시키는 데 합의를 했다. 즉 주교들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교황과 황제를 다 같이 만족시키고 충성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주교들은 마누라도 포기해야 했다. 그때부터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지 못했다. 2021-11-09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0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8_ 교황과 황제의 싸움
    Heinrich vor Canossa 카노사의 하인리히 (1862) 교황과 황제의 싸움 형님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형님 같은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이 대부분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하는 전도사들한테 왜 그런 칭호로 불리시게 됐는지는 알길 바이없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정말 정 많고 자상하고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성정을 지니신 은사이셨다. 세상이 요상스러운 것은 그분한테 은덕을 입은 전도사들이 적지 않은데 나중 은사에게 곱지 않은 말을 뇌까리는 걸 보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식이 형님 같으신 은사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다. 세월이 살처럼 빠름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 교단 기독교 교육학의 길을 열고 닦으신 은사께서 늘 동안의 모습으로 활기차게 제자들을 키워 오셨는데 활동이 여의치 않으시다니 세월의 속절없음이 손에 잡히는 것 같다. 소망하고 기도드리기는 작년 인천 총회에서 기쁘게 뵈었듯이 금번 총회 석상에서도 놀라는 표정으로 만나 뵐 수 있도록 해야겠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토스카나의 마틸데, 클뤼니의 후고 아무리 성직자라도 죽으라면 죽을지언정 한 몸 이룬 마누라를 포기하라는 교황의 명령은 따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금알을 낳는 땅을 물려줄 자식까지 없어질 판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상의 지배자와 싸움을 벌인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그 대상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였다. 교황은 두 가지 명령을 무기로 휘둘렀다. 삼중관을 쓴 교황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의 모든 주교들은 황제가 아니라 교황한테서 주교 지휘봉을 받아야 된다. 그리고 독일의 모든 주교들은 한사람 빠짐없이 마누라를 포기해야 한다.』 독일 성직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마누라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이게 교황의 첫 번째 명령에 대한 성직자들의 답변이었다. 두 번째 명령에 대한 황제의 답변은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다웠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옛 도시 밀란에서 주교를 직접 임명했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 교황 이에 교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황제를 교회에서 출교 조치해버렸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칙령을 공포했다. 교황의 영적인 명령은 무서웠다. 헨리 4세는 자신이 더이상 황제일 수 없다는 사실에 뜨악해졌다. 백성들은 황제의 명령에 고개를 외로 꼬았다. 이 엄청난 사실의 변화에 황제는 숨을 제대로 몰아쉴 수 없을 정도로 기가 찼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교회와 화해하는 일뿐이었다. 칼이 없는 교회의 힘이 이토록 셀 줄을 황제는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심 놀라기는 교황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헨리 4세는 허겁지겁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그 해는 이미 많이 지나간 끝 무렵이라 라인강은 꽝꽝 얼어 있었다. 12월에 헨리는 적은 무리의 수행원과 알프스를 넘었다. 말의 발이 묶여 있어서 그들은 눈이 덮인 산등성을 다리를 질질 끌며 오르락내리락했다. 살아서 로마 평원에 도달한 사람은 몇 안됐다. 그 사이에 교황은 회합이 있어 교황청을 떠나 북쪽 이탈리아에 있는 카놋사 요새에 도착했다. 교황청에서 헛걸음친 황제는 추레한 꼴로 카놋사 요새까지 황망히 달려왔다. 2021-11-0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02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7_ 교황의 무기
    카를로 엠마누엘레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는 하인리히 4세 교황의 무기 아파트를 헐하게 공급해 주겠다던 회장이 이마에 상처를 받고 느닷없이 정계를 떠났다. 제 돈 가지고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냐며 코를 벌름거리더니 이런저런 약속을 제 돈 아까워 헌신짝처럼 내패댕이 쳤다.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단다. 그러니까 부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정신이 오락가락할 적에 하는 말인 성부르다. 『야, 이 노랭이야. 네 돈인데 왜 안 가져가니』 세상 정치는 그나마 새로움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우리 교회 쪽은 어떤지 모르겠다. 세상에선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며 머리를 맞대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공금을 그것도 신성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돈을 제멋대로 쓰고도 어엿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행세를 하고 활갯짓을 치니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인지 모르겠다. 떠나거라. 회칠한 무덤이여 이 봄에 열매 없는 늦은 가을 나무마냥 뿌리째 뽑혀 두 번 세 번 가뭇없이 사라져다오. 공회 앞에서 회술레를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래도 제 버릇 누구 못 주겠지만. 중세 때 교회와 나라의 말다툼은 왕들이 왕이랍시고 제 기분 내키는대로 결혼하는 걸 못하게 잡도리하듯 간섭할 때 일어났다. 결혼이나 이혼문제에 있어 교회의 중재와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교회는 왕한테 두 가지 무기를 휘둘렀다. 첫 번째 무기는 출교였다. 이 조치는 왕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도 없고 교회의 어떤 위로와 편의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또 다른 무기는 금령이었다. 이 조치는 당사자인 왕의 영토에 적용되는 출교 조치였다. 벌 받을 당사자가 프랑스 왕이라면 교회의 모든 봉사가 프랑스 전역에서 금지됐다. 그러면 왕의 신하들은 자기들 상전이 교황한테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하느라 땀을 찔찔 흘리며 골머리를 썩였다. 교회와 나라의 또 다른 형태의 싸움은 나라가 교회 일에 콩이야 팥이야 하며 나설 때 일어났다. 그 까닭은 교회가 독일과 프랑스 영토의 거의 반이나 되는 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땅을 소유하는 게 처음에는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수도사들이 복음을 선교하려고 쑥대머리 야만인들이 북부 유럽으로 갔을 때 수도사들이 생계를 꾸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사용하지 않는 임자 없는 땅을 일구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광대한 개간된 땅이 교회, 즉 교황청 소유가 되었다. 나라와 곤란한 문제들이 생기게 된 것은 땅에서 모든 세금이 나왔고 땅의 소유자들이 군대의 병사들을 대줬기 때문이었다. 주교와 협의하는 교황 자연히 왕은 땅이 돈을 잘 바치고 사람을 공급해 주는 사람들의 소유가 되길 바랬다. 궁리 끝에 왕은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고이얀 처사에 교황은 울대를 돋우며 발끈했다. 왕이 주교와 수도원장한테 든든한 배경이 되주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주교나 수도원장이 교황의 아랫것들인지 왕의 졸개들인지 하는 문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권력이란 모래 같다던가. 아마 모래를 움켜쥐면 쥘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속성을 두고 이른 말인 것 같다. 이제 장로 신분의 대통령이 나왔으니 그가 권력을 잘 선용하도록 아부할 게 아니라 기도해야 될 것 같다. 2021-10-2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0-2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7_ 대관식
    Pope Leo III, crowning Charlemagne from Chroniques de France ou de Saint Denis 대관식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처럼 교황들은 왕들에게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워주었다. 프랑크족의 왕 피핀은 교회로부터 왕관을 받았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교회의 허락을 받아 그의 왕국을 신성로마제국이라 칭했다. view of the vatican basilica from a roof near saint Peter square. 팔백 년 성탄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성 베드로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다. 샤를마뉴가 추위를 참으며 베드로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교황이 언 땅을 사뿐사뿐 밟고 샤를마뉴 뒤로 다가가 머리에 왕관을 털퍽 씌웠다. 기름 부음 받은 대관식 답례로 왕들은 교황한테 봉투 하나 디밀고 끝난 게 아니라 왕이나 황제 신분에 걸맞게 처신을 했다. 실례로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쑥대머리 야만인들과 곤란한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되었을 때 피핀은 불원천리하고 말을 달려와 야만인들을 된통 혼을 내주고 다섯 도시를 빼앗아 그 도시의 열쇠를 교황한테 공손히 건네주었다. Harun-Charlemagne 이것이 한 왕국으로서의 교황권의 시작이 되었다. 754년부터 1870년에 이르기까지 교황들은 이태리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처음에 교회와 국가는 참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점차 서로의 힘이 커갈수록 서로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한 다툼들은 교회와 국가가 다 같이 기독교적이고 거룩하다고 말을 앞세워도 이익에 관련된 문제들이라 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문제의 어려움은 교회와 국가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는 데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말인즉슨 국가는 질서, 재판, 치안 등으로 땅 위 인간의 외적 생활을 다룬다. 국가는 육체와 지상 적인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또한 그들의 말인즉슨 교회는 인간을 천국을 위해 준비시키고 양심, 경외, 마음 등으로 인간의 내적 생활을 다룬다. 교회는 영혼을 돌보아 하늘로 이르게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구분이 아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즉 영혼이 육체와 따로 떨어져 있지도 않고 하늘로 가는 길이 다시 말해 교회가 땅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 자체가 정부인데다 많은 땅의 소유주라는 사실에서는 갑절로 어려워진다. 하루해가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았다가 이제는 좀 개 꼬리만큼은 된성 부르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사람들의 여민 옷이 얇아질 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불끈거린다. 영성에 차진 않지만 교회의 편린을 주절거리고 있는 이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일런가... 2021-10-18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0-18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5_ 교회와 국가
    13th-century stained glass depiction of Charlemagne, Strasbourg Cathedral 교회와 국가 신학생 시절 주일 아침 서울운동장 앞에 서 있곤 했다. 천호동으로 가려면 당시는 꼭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사철 입는 단벌 회색 춘추복에 댕기를 매고 검은 가방을 들고 서 있노라면 영락없는 이방인 행색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뀐 그곳은 주일 아침이면 등산복 차림의 남녀들로 북적댔다. 그런 북새통에 나만 달랑 그러고 서 있으니 영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사당동 골짜기에 밤이면 개구리 합창에 귀가 서늘해지던 그 시절 신학생들은 눈빛만 형형했지 행색은 영양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채플 때 통성기도를 할라치면 그들은 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세계를 향해 통곡했다. 사면이 꽉 막힌 시절에 중공과 무슬림에게 나아가 말씀 전할 날을 다짐하며 서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믿음의 눈이 아니면 머리만 갸웃거릴 일이었다. 간혹가다 기숙사 식당에 특식으로 돼지 볶음이 올라오면 줄을 두 번 서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렵던 시절 기도는 즐거웠고 선교 열망은 가슴을 터칠 듯했다. 로마제국 붕괴 이후 새로운 서방 세계를 형성하는데 교회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교황들은 모든 북부지역들에 선교사들과 수도사들을 파송했다. 선교사와 수도사는 거친 북쪽 지역민들에게 한 신앙 그리스도교와 한 언어 라틴어를 전달했다. 유럽 전역의 모든 교육받은 사람은 라틴어를 알아들었다. 이렇듯 교회는 개화된 남부 유럽과 미개한 북부 유럽을 통합시키는 가교역할을 담당했다. Europe around 814 유럽은 현재보다 훨씬 작은 나라들로 바글거렸다. 그래서 싸움도 잦았다. 하나의 강력한 제국 로마가 사라진 후유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전에 로마제국에서 누렸던 하나의 통일체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서방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가 하나의 새로운 로마제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인들이 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갔다고 생각한 것처럼 프랑크족은 로마제국이 자신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크족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 신성 로마 제국을 설립했다. 이 나라는 느슨하기는 했지만 유럽의 올망졸망한 여러 나라들을 여러 세기에 걸쳐 하나로 결속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체가 다 망라되었던 건 아니다. 영국은 유럽에 한 번도 낀 적이 없었고 프랑스는 잠깐 딱 한 번 포함됐었다. 그러므로 중세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할라치면 한 단일한 정부를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의 큰 덩치 속에 여러 단위가 있는 아파트 같은 형태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교회와 국가는 한동안 서로 도왔다. 국가는 교회가 백성한테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언어를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와 교회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왕들은 지배할 힘이 있기에 지배자가 된 5공 시절 머리 벗겨진 사람 같은 강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들은 힘만을 의지해 통치해서는 그 통치가 너무도 힘겹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도록 맡겨 주시지 않는다면 무지렁이 백성들일지라도 얼마 가지 않아 왕한테 입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었다. 2021-10-05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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