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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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인간 혁명 사회주의가 
아니라 칼빈의 개혁주의 기독교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이 보여 주는 
좋은 본과 그들의 희생을 통해 배워 

바울 사도의 말과 
선동하는 자들의 소리가 충돌 

바울 사도의 말 세상을 바꾸고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져 

빌라도의 가슴 속 욕심이 
판단력과 분별력 있음에도 
그를 배신하게 만들어

지진처럼 제102회 총회에 
다가왔거나 일어난 
총신의 김영우 시대 

성경과 개혁주의의 소통방식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확장되는 
혁명적인 개혁주의 시대 도래 

지난밤에는 금식을 했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려 회개했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목사가 확실했으나 오늘은 어떨까 또 내일은. 누군가가 하나님을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오늘은 내가 무수(無數)했다. 그래서 나를 하나님 앞에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끝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목사가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다투지 않고 마음 졸이지 않고 화내지 않고 그렇게 총회를 드나들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총신 선배 동창 후배 만나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그런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10월도 흔적 없이 가고 어느새 입동(立冬)마저 지나가 버렸다. 겨울이 이제 성큼 다가섰다. 대치동 총회 고개를 넘을 때 노란 은행잎이 무심한 총대들 결의처럼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 나뭇잎은 허공(虛空)의 허공(許公)처럼 흙이 되리라. 제101회 총회와 실행위원회 납골당 결의를 뒤집은 무임승차 총회장 전계헌. 총대영구제명 총회 결의에 반해 서울중앙법원에 소송을 건 허활민. 재판에 이기면 다음 총회는 총대권이 다시 살아나는 걸까. 살아나면 그 총대권으로 또 무엇을 하려나. 총회 상대 재판에 지면 그 불법의 온상 산서노회는 어찌 될까.

오고 있는 가을에 받은 총신 소식을 가고 있는 가을에야 듣고 겨울을 맞고 있다. 목사는 단순히 설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교하기 이전에 아니 설교하기 위해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결국 백지에 그 백지를 메운 흔적을 묶은 설교에 그들이 쏟아놓는 것은 자신들의 삶 체험과 성경 읽기 이력이 뒤섞인 어떤 덩어리다.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과 종교개혁 500주년이 겹치고 있다. 이 우연한 중첩이 한국 교계에 범상치 않은 경고로 들린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7년 11월 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러시아 왕조를 전복시킨 임시정부를 다시 무너뜨리고 마르크스 사상에 기초한 소련을 세운 것이다.

레닌은 혁명의 서사시다. 레닌은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그것은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이다. 그것은 20세기 역사에서 압도적인 드라마다. 그 속에 격렬함과 격정이 혼재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레닌의 혁명열차다. 그해 4월 망명지에서의 귀국이다. 봉인(封印)열차가 등장한다. 1917년 4월 9일(당시 러시아 율리시스력 3월 28일) 오후 3시 스위스의 취리히 중앙역에서 레닌과 그의 일행 32명이 승차한 열차는 8일간 3200㎞를 달려 1917년 4월 16일 밤 11시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기적소리가 울렸다. 적색 투쟁을 알리는 굉음(轟音)이었다. "열차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힐긋 보였다. 기관차는 불뱀(fiery snake)처럼 구불구불하게 다가섰다. … 10년 해외 생활 뒤 레닌은 열차에서 러시아 땅 위로 내려왔다.”(로버트 서비스 『레닌』) ‘불뱀’은 요한계시론적 예언이다. 구질서는 저주받고 파괴될 운명이다. 
  
플랫폼은 군인 노동자 군중들로 차 있었다. 그들은 ‘레닌’을 외쳤다.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군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했다. 한쪽에서 ‘인터내셔널’노래도 불렀다.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리라.” 역 앞 장갑차에 레닌이 올랐다. 그의 외침은 거침없었다. “약탈적인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이다...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 만세.” 장갑차가 이동했다. 깃발과 횃불이 뒤따랐다. 

공산주의 소련은 레닌의 작품이다. 하지만 혁명은 타락했다. 볼셰비즘은 ‘역사의 신(神) 하나님’에 대한 거친 도전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을 한다. 10월 혁명 74년 뒤인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됐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을 무르익게 한 현장인 영국에서는 그의 예견과 달리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높은 윤리의식으로 사회적 책무를 감당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검약과 성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 정신으로 무장된 개혁주의 청교도의 후예들이 영국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분석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학교와 병원을 짓고 약자를 돌봤다. 중산층이 앞장섰고 귀족이 도왔으며 노동자 계층도 동참함으로써 나눔이 일상화됐고 배려가 생활이 됐다. 양심의 변화가 나라를 갈아엎었다. 참된 인간 혁명은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칼빈의 개혁주의 기독교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보여 주는 좋은 본과 그들의 희생을 통해 배운다. 

무엇에 사로잡힌다는 것 그것은 심장이 삶을 계속 의욕적으로 밀고 가라는 신호다. 무엇에 사로잡히지 못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본다. 가야 할 길보다 지나온 길을 바라보는 사람은 슬프다. 그래 가야할 길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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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2일 오전 11시 30분 산정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영찬 장로의 기도와 할렐루야찬양대의 찬양 그리고 광고 후 교계 거목 길자연 목사가 아끼는 김관선 목사(제102회 총회 농어촌부 부장)는 누가복음 23;13-25의 성경복독을 힘차고 빠르게 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저희는 소리 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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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선 목사는 성도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게 한 뒤 ‘소리’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사람의 이성적이고 조리 있는 말은 사상도 담겨 있고 가치도 담겨 있고 감동도 주고 설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성치는 소리에는 감정만 담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리는 짐승도 냅니다. 사물들도 각각의 소리가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무슨 소리인가 무엇인가 분간이 가능합니다. 경험상. 그러나 말은 사람만 합니다. 사람이 하는 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말하고 사람을 향해서도 말하면서 소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이 말씀이심을 보여 주고 있고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치 이런 것을 아주 멋지게 펼쳐 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말합니다. 사람의 인격 말로 완성됩니다. 사람의 신뢰 말입니다. 동양적 사고에 있어서 믿을 신(信) 자가 사람 인(人) 변에 말씀 언(言)입니다. 사람의 말 이게 믿음입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있어. 믿어줍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소리만 지릅니다. 그 소리 속에는 의식도 가치도 생명도 없는 공허하기만 합니다. 그 소리가 이 땅에 진리를 진정한 생명을 짓밟아 버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과 소리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물론 성경에 가치 있는 소리도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소리라고 하는 이유는 마치 신호나팔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진정한 신호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리는 가치 있는 신호였습니다. 그가 외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외친 소리는 아주 귀하고 가치 있는 소리였습니다. 시적으로 소리 없는 외침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수많은 소리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말하며 살아갑니까. 아니면 소리 지르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제대로 말하며 살아갑니까. 이거 뭔 소리야 하는 말이 있죠. 여러분 이거 뭡니까. 말을 했는데 무슨 소리야 그러는 겁니다. 좀 심하면 동물 이름까지 붙여 말합니다. 말을 했는데 말로 들리지 않고 소리로 들립니다. 영혼도 담기지 않고 진실도 없고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지껄이는 소리입니다. 내가 말했을 때 상대가 기뻐해 주고 즐거워해 주고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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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하시니 온 우주 만물이 창조됐습니다. 그 말씀으로 인해 나온 결과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예수님이 죽으시게 되는 사형선고 거기다 어떻게 죽일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결정까지 무엇이 주를 이루고 있느냐 소리였습니다. 보세요. 빌라도 똑똑한 사람입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할 때 로마에서 황제의 명을 받고 총독이 되어 이스라엘까지 파견되었습니다. 총독은 황제에게 보고하며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법적 지식이 있고 상식이 있고 행정력이 있는 그리고 정치력도 있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 똑똑한 사람이 판단 재판 그리고 그 지역의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겁니다. 그런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고 결정을 했습니다. 무죄.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몇 번이냐 말하냐 하면 세 번이나 합니다. 빌라도가 말하면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빌라도에게 그런 결정권이 있습니다. 더욱이 유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총독이었으니 그 결정이 인정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조리 있는 말 상식과 정보 그리고 법적 지식을 동원해 결정되고 선언된 말인데 그 말을 소리가 이깁니다. 그 말을 소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빌라도가 세 번이나 말합니다. 무죄. 무죄. 무죄. 그런데 소리는 거세집니다. 소리가 아우성을 칩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지릅니다. 이 소리 속에는 감정만 있고 이성과 판단력이 없습니다. 진리도 없습니다. 정의도 없습니다. 그런데 소리가 크니까 이겨버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큰소리로 이길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리가 이기는 세상처럼 불행한 세상은 없습니다. 경기의 응원은 실력이 아닙니다. 실력으로 이겨야 합니다. 그게 엄정한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예수님의 사형도 결정하고 그 방법까지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리가 정말 죽어야 될 사람 살인까지 한 바라바는 풀어 주어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리고 의로운 분은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빌라도가 어떻게 하든 바로 잡아보려고 세 번이나 말하지만 소리가 이기고 맙니다. 

내 입에서 생산된 말이 말이 아니고 소리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 생명력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큰 목소리로 세상을 이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녀를 키울 때 큰 목소리로 야단쳐서 자녀들이 바로 잡아집니까. 목소리에 눌리는 것 같지만 여전히 해결이 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말은 논리가 있고 가치가 있고 설득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소리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소리가 결국 진리와 정의를 짓밟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하나님의 아주 치밀하신 계획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구원의 도구가 되게 하셨지만 이렇게 이루어지는 과정은 다 악이었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소리도 하는지 모른 채 소리에 가담해버린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소리를 뒤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여론을 주도하고 조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경우도 많습니다. 잘못된 여론을 생산해 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이 부분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 쑥덕거리며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리를 선동합니다. 그래서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죽으시게 합니다. 선동의 결과가 무리의 소리였습니다. 마가복음 15장에 선명하게 나옵니다.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결의하고 선동하고 이런 소리로 세상을 어둡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여론을 못된 소리를 만들어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도록 무엇이 우리를 움직이는지 살펴보십시오. 원하지 않는데 벌써 그것에 목소리를 맞추고 있지 않습니까.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슴에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선지자를 세우실 때 주신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에 담기게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로 산다는 것 선지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을 외치는 것입니다. 전달자일 뿐입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 소명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예레미야 1장 4절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구별해냈다. 너를 선택했다. 이제 너는 나가서 말해라. 나는 너를 선지자로 세웠다.’ 그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울부짖듯 하소연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시옵소서. 나는 어린아이같아 말할 줄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 하신 말씀이 ‘내가 너의 입에 나의 말을 넣으리라. 너는 외쳐라.’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치는 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주신 말씀들이었습니다. 이 때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은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주신 말씀을 외치는 자들이 진정한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말씀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또 중요한 모세같은 위대한 선지자 그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말할 줄 모르는데요.’하며 그렇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율법을 선포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설교자로 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말씀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위대한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말에 부족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이 어눌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평생 말로 전도하는 사도인데 굉장히 공부 많이 한 사도인데 ‘나는 유창하게 말하는 실력이 없다’고 말재주가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졌고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쫓아다니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 무리는 선동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를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훼방을 합니다. 그를 공격하는 선동을 하고 그들로 말미암아 바울 사도가 여기저기서 쫓겨납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과 선동하는 자들의 소리가 충돌합니다. 결국에는 바울 사도의 말이 세상을 바꿔놓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졌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사람과 사귀고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쌓인 사람이 생산하는 말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온갖 쓰레기같은 정보가 내 속에 쌓이고 읽는 책도 만나는 사람도 건전하지 않으면 내게서 생산되는 말들은 말이 아니고 소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창하지만 선동가들이 있습니다. 역사에 엄청난 죄를 범한 선동가들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렇습니다. 얼마나 유창합니까. 히틀러가 외치면 독일 국민은 ‘하이 히틀러(만세 히틀러)’를 외치며 열광했습니다. 그러면서 독일은 지금도 끊임없이 반성하고 사죄해야 되는 역사적 흔적을 남겼습니다. 기가 막히게 말을 잘 하고 선동하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히틀러 그 속에 쌓여 있던 광기가 독일 전체 국민을 그 어마어마한 죄악 속으로 몰아넣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내 입에서 말이 나오게 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누구에 의해 선동된 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소리 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보고 저기서 들은 이야기들을 여과도 하지 않은 채 정보 정리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쏟아내면서 옳지 않은 말 확인도 되지 않은 채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죽이기도 하는 그런 불행한 모습이 아닌지 점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정제된 최고의 정보를 성경을 통해 주고 계시고 그리고 설교를 통해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내 속에 쌓여 내 입으로 전달되면서 세상을 살리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 안에 쌓인 쓰레기같은 정보들이나 사상이 우리에게 심어 준 말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만드는 불행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입에서 생산되는 말 다시 한 번 점검하십시오. 내 입에서 소리가 나오는지 말이 나오는지 그리고 나는 누군가를 선동해서 악한 소리를 함께 지르도록 만들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면 내 안에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해서는 안 될 소리만 내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결국 소리가 이겼습니다. 여러분. 이 소리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빌라도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한 빌라도 로마의 총독이 된 빌라도 그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소리를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권한이 있었고 물리적 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 사도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갑니다. 거기 가는 이유는 거기서 로마로 갈 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 더 위험해진다는 걸 직감했고 성령의 감동을 통해 알았고 예언자들이 그렇게 말했지만 죽을 각오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곳에서 바울에게 달려들어 죽이려고 합니다. 그때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군대 장교 천부장이 급하게 달려와 바울 사도를 보호해 줍니다. 사실은 바울 사도를 부대에 구금한 것이죠.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 사도를 보호해 주기 위한 조처죠. 정상적인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로마까지 가는 길을 열어준 것이 천부장이었습니다. 물리적 힘과 판단력 그리고 빠른 감각으로 그는 바울 사도를 보호하고 로마까지 가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천부장도 그러할진대 그들까지도 관할하고 있는 빌라도는 뛰어난 판단력과 능력과 물리적 힘을 가지고 예수님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 무죄한 사람이 죽지 않도록 무리를 해서라도 보호할 책임을 가진 빌라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충분한 힘을 가진 그는 소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여러분 뛰어난 판단력과 정보력을 가진 그가 왜 무너집니까. 판단력도 있습니다. 양심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있습니까. 욕심입니다. 욕심이 나로 하여금 나를 배신하게 만듭니다. 빌라도의 가슴 속에 있는 욕심이 아주 명료한 판단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를 배신하게 만듭니다. (어조가 낮아진다) 무리의 소리에 손을 들어줍니다. 무리에게 적당한 만족을 줍니다. 무죄라면 풀어줘야죠. 빌라도는 무리에게 조금이라도 만족을 주려고 ‘그러면 그냥 풀어주지 말고 좀 때려서 내놓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이 자체가 타협이잖아요. 무죄하면 풀어줘야지 왜 때립니까. 그렇게 타협을 하기 시작한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 그 힘만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남보다 많이 알고 많이 배웠으면 훨씬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맡고 있는 자리가 훨신 더 힘이 세다면 그만큼 더 큰 책임과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충분한 사명이 있는 겁니다. 그걸 잘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이 빌라도는 손을 들고 맙니다. 무리의 소리 앞에 자신의 말꼬리를 흐려버리고 명료한 판단력을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버려둡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이런 일이 많습니다. 아주 명료하고 선명한 데 여론을 청취해 봅니다. 여론을 청취할 일이 없는 선명하고 확실한 것들이 있어요. 답이 확실한데도 여론을 청취해 보고 결정을 내린다며 타협의 길을 열어 놓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언론은 저렇게 흘러가니까 그게 두려워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고 쉬운 것조차 결정을 못하는 겁니다. 우리 귀에는 수많은 소리가 들리지만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늘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말과 소리 중에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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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하면 억울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결정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나의 믿음을 내가 배신합니다. 나의 지식을 내가 배신합니다. 나의 판단을 내가 스스로 짓밟습니다. 옳지만 어떻게 저렇게 말하는데 그래서 결국 무릎 꿇고 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합리화에 들어갑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 그때 그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라고 자기변명을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사람들 앞에서 손을 씻습니다. ‘내게는 죄가 없다. 너희들이 당해라.’ 여러분 소리 앞에 무릎을 꿇는 그 자체로 책임져야 되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가장 큰 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내가 나를 기만하는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용적입니다. 실용주의가 판을 칩니다. 공리주의도 무너져 버립니다. 어느 게 정말로 공공의 이익에 맞는가. 어느 게 정말로 이 세상을 지탱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 내게 유리한가 빠른가 편리한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흔히 유행처럼 좋아하는 ‘가격 대비 성능’을 줄여서 말하는 ‘가성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만 판단합니다. 어느 쪽이 싸고 좋은가를 따집니다. 비싼 값을 지불해야 되지만 힘을 더 써야 되지만 그래서 힘을 쓴 만큼 돈을 지불한 만큼 효율성은 높지 않지만 뿌듯해지고 감격스러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포기해 버립니다. 실용주의에 휩쓸려가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소리 속에 같이 휩쓸려 가버리고 내 안에 있는 욕심만 남게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들리는 수많은 소리들을 걸러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아니다 하는 판단력을 갖도록 주체를 분명히 하십시오. 말씀이 내 안에서 힘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입에서 소리가 아닌 말이 나오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용기 있게 한 말을 통해서 이 땅에 정의가 서도록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를 지켜 주는 보편적 진리도 있지만 얼마나 많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오래 지켜오던 가치들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면 다 없어지고 맙니다. 전에 있던 법이 폐지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용인하자면서 이렇게 저렇게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힘들이 무너져 버립니다. 그렇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겁니다. 버리지 않고 지켜야 될 가치가 있고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지탱해야 될 소중한 것들이 있음을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소리에 끌려 다니면 지켜내지 못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소리로 인해서 우리 귀가 점점 듣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소음에 시달리다 보니 청력에 이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청력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적 삶은 건강해 지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들으며 우리 입에서 생산되는 말들이 건강해 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상을 살리는 소리가 아닌 말을 하는 성도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건강한 세상 희망이 넘치는 세상 정말 소리가 아니라 말이 이기고 정의가 이길 수 있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건강한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런 우리가 되기를 주님이 바라십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산정현교회를 지켜냈던 신앙의 선배들이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되라고 속삭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다시 한 번 내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고 말을 제대로 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다짐하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에 총회 측과 총신 측이 미끄러지듯 익산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측이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말한다.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그러게 허활민이 잠잠해서.’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소망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믿음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미래라고 부른다.

리히터 규모 5.8의 역대 1위 경주 지진이 2016년 9월 12일 오후 8시 32분에 일어난 지 1년 2개월 만에 인근 포항에서 2017년 11월 15일 오후 2시 29분 리히터 규모 5.4의 지진이 다시 발생하자 전문가들은 강력한 지진이 또 다른 지진을 부르는 '지진 도미노'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1년간 경주 지진의 여진(餘震)이 줄어들면서 지질구조가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면서 경주 지진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경주 지진과 달리 이번에는 전국에서 흔들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김영희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지진이 발생한 진원(震源)이 작년은 지하 15㎞였지만 이번은 9㎞로 얕아 에너지가 사방으로 더 잘 전달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지진처럼 제102회 총회에 다가왔거나 일어난 총신의 ‘김영우 시대’는 성경과 개혁주의의 소통방식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확장되는 혁명적인 개혁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충격이다. 총회를 부패 수렁에 허우적이게 한 정치적인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달인 허공(許公)보다 더 정치적인 개혁주의(改革主義)의 지도자 김영우 목사는 하나님의 섭리로 마련된 역사의 갈림길에 섰다. 그러므로 총신 총장이면서 개혁주의 지도자로서 깃발을 쳐든 김영우 목사는 총회와 총신을 위한 당면한 선택의 순간에 무엇이 더 성경적이고 어떻게 하면 더 개혁주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를 기도하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김관선 목사의 설교처럼 총회의 부패하거나 우매한 자들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에 근거한 판단과 선택에 따른 행동이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 그것이 부패한 가방배달부들의 결론. 허공(許公)이 입을 벌려 소리 지르기 전에 내가 모든 소리를 듣고 말했던 것과 같이 같은 동색의 계절이 된 외로운 지폐를 세는 무리들. 빈 신앙고백과 돈 봉투에 중독된 총대들 그 순간 누가 배달의 초인종을 눌렀다. 타는 목마름과 물이 될 돈을 배달하기 위해. 욕심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바로 그 계절의 부패로. 단 하나의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 더 잔인한 방식으로 내가 당신을 지지하겠노라고. 믿음이 아니라서 가능한.

늙은 집배원 허공(許公)은 매일매일 참으로 오랜 시간을 이 총회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달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말한다.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고. 초인종이 울리고 정기적인 식사 같은 목소리의 통화 중독된 밀담 비슷한 슬픔 잔인한 단 하나의 답장... 그렇게 주소 없는 봉투는 이름은 아는 수취인에게 배달되었다, 고로 허공(許公)은 존재한다. 이 늙은 계절에. 그는 이미 제102회 총회 결의로 총대 제명되었지만 그는 증거를 내놓으라며 버젓이 소리 지르곤 한다, 그것을 충실히 변호하고 다니는 하수인도 있다. 그리고 총회 따위 아랑곳 않는 그는 총회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소송을 하나님 앞에서 놀기 좋은 대치동 총회 재판국이 아닌 서초동 법원에 했다. 성경도 기록하고 있다, 단 한 권의 책은 이미 쓰였으며 모든 말들은 다 전파되었고 모든 것은 예정되었고 예정된 단 하나의 답장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간다고. 이 세상과 총회 일이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악한 자의 허공(虛空)같은 사라질 끝이 있어 다행한 일이다.

201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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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선 목사 광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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