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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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라세 할스트롬 
출연 : 줄리엣 비노쉬, 조니 뎁, 레나 올린 
음악 : 레이첼 포트만   


영상으로 빚은 ‘오감의 연금술’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누군가를 선택해 초콜릿을 선물하고 그 반응을 본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 결과는 대체로 둘 중 하나다. 무덤덤해 하거나 몹시 반색을 하거나.  

대개의 선물이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 매일반이지만, 같은 값의 선물에 견주어 초콜릿의 경우는 다소 유별난 측면이 있다. 흔히 ‘사랑의 묘약’으로 불리는 초콜릿의 맛을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콤 쌉싸름하다’는 어느 영화 제목마따나 초콜릿의 맛은 복합적이고 오묘하다. 맛뿐 아니다. 조각품에 가까운 모양새와 신비감을 품은 광택, 신경망을 파고드는 깊숙한 향기…. 초콜릿의 매력은 단순한 음식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렇다 해도 초콜릿 애호가의 반색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호들갑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맛이 아무리 오묘하다 한들 저리 요란을 떨 것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이 점에서 앞서 예로 든 두 부류의 인생관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초콜릿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긴장과 스트레스로 충혈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맛보는 초콜릿의 여유, 그 일탈의 미감 또한 소중한 삶의 한 장면이다.’ 

혀 끝을 스치는 화학 반응의 연금술은 마침내 사람의 의식과 철학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사회 변혁의 한 동인이 되기도 한다. 영화 <초콜렛>은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이 초콜릿 가게를 두고 벌이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화해를 그린 깜찍한 우화다. 영화 속에서 초콜릿은 맛의 유혹 차원을 넘어, 주민들을 정치적·철학적·종교적·윤리적 혼돈에 빠뜨리는 ‘주제 넘은’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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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겨울, 빨간 외투를 입은 비엔나(줄리엣 비노쉬)와 어린 딸이 마을을 찾아온다. 비엔나는 초콜릿의 고향 ‘마야’의 피를 이어받은 신비의 여인, 북풍을 따라 떠도는 방랑자다. 비엔나는 광장 모퉁이에 작은 초콜릿 가게를 연다. 초콜릿을 생전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에게 비엔나와 그의 가게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마을에 호기심을 동반한 작은 흥분이 일기 시작할 무렵, 비엔나와 주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난다.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데다 가톨릭 전통이 엄한 마을의 질서가,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 비엔나 모녀에게 거리를 두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초콜릿의 유혹으로 인해 자신의 권위가 미미하게나마 흔들리게 됨을 감지한 시장은 비엔나 모녀를 이단으로 모는 험담을 유포시키고, 신임 교구 신부에게 압력을 가해 주민에 대한 윤리적 고삐를 강화하려 한다. 주민들은 비엔나의 세련된 친절과 우정, 그리고 감미로운 초콜릿의 마술에 점점 젖어들면서도 한편으로 보수적 가치관과 질서를 강요하는 시장과 교회의 권위에 눌려 번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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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순수한 심성에 반한 비엔나가 마을에 정착하려는 결심을 할 즈음, 갈등이 급상승하면서 ‘위험한 선택’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럴수록 전전긍긍하는 시장의 압박도 강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마침내 자유와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과, 보수적 질서의 우산 아래 몸을 맡기고 가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첨예한 대립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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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초콜릿은 갈등의 시원이자 변화의 훈풍이며 화해의 매개 노릇을 하는 핵심 디테일이다. 초콜릿의 매력을 어떻게 연출하느냐가 극적 설득력의 관건이 됨은 물론이다. 할스트롬 감독은 이를 위해 전방위적·공감각적 미학을 펼쳐 보인다. 초콜릿의 신비한 광택을 극대화한 은은한 조명, 비엔나의 자태와 초콜릿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의상들과 가게 인테리어, 환상적 분위기를 극대화한 플래시백 시퀀스. 사운드 트랙의 절묘한 배합도 빠지지 않는다. 아카데미 작곡상 수상자인 레이첼 포트만의 ‘달콤 쌉싸름한 현악’은 마치 사운드로 빚은 초콜릿에 비유할 만하다. 영화의 흐름에 따라 때론 경쾌하게, 때론 우울하게, 때로는 긴박하게 혀 끝으로 녹아드는 선율! 

클라이막스를 지나 깔끔한 엔딩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달콤한 연출 감각에 젖어, 관객들은 어쩌면 입 안 가득 고인 군침을 소리 죽여 삼켜야 할지도 모른다. 입장하기 전에 미리미리 ‘소리 없는 초콜릿’(에티켓 감안 ^-^)을 준비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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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 라세 할스트롬의 ‘따뜻한 고집’ 

<개 같은 내 인생>을 보셨다면, <길버트 그레이프>도 보셨다면, 그리고 <사이더 하우스 룰스>마저 보셨다면 당신은 이미 라세 할스트롬의 ‘따뜻한 고집’에 사로잡힌 팬이다. <초콜렛>을 포함해, 네 영화 모두 주인공(또는 나레이터)의 성장 과정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결핍 가정의 구성원들이 무대의 주변부를 서성이며 아픔과 고독을 나눈다는 설정도 흡사하다. 나름의 상처를 간직한 등장인물들의 화해와 해원을 그린다는 점, 특유의 유머와 감성을 발휘하여 갈등과 대립을 초월하는 가슴 뭉클한 휴머니즘의 해피엔딩으로 관객의 발걸음을 가뿐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도 할스트롬 영화는 대부분 닮은꼴이다. 

그러면서도 할스트롬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중첩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군살 없는 극적 구성과 매끈한 흐름, 꼼꼼하게 안배된 캐릭터들, 그리고 유려한 영상미 등이 어우러져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흡입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강점을 바탕으로 할스트롬 감독은, 블록버스터가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고집스럽게 완성도 높은 ‘소품’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할스트롬 미학의 또다른 매력은 영상과 사운드의 절묘한 궁합이다. 그의 영화들 거개가 심금을 파고드는 상큼한 선율을 부둥켜안고 있다. 할스트롬의 음악적 감각은 그의 전력과 무관하지 않다. 1946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태어난 할스트롬은 10세 때 벌써 8분짜리 단편 <유령도둑>으로 신고식을 한다. 10여 년 간 TV감독으로 활동하던 할스트롬은 1977년 스웨덴이 낳은 월드스타 ‘아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작업할 기회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할스트롬 감독의 재능 하나 더. 배우의 역량을 극대화해주는 친화적 연출력이 그것이다. 아직 무명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을 세상에 알린 영화가 바로 <길버트 그레이프>였다. 이 영화를 거치면서 조니 뎁과 줄리엣 루이스는 자신들의 독특한 연기 세계를 꽃피우게 되었다. <사이더 하우스 룰스>에 비친 샤를리즈 씨어런의 상큼한 매력은 영화 속 ‘캔디’ 역에 녹아들면서 제대로 광채를 발한다. 

할스트롬 감독은 <프라하의 봄>에 출연했던 스웨덴 여배우 레나 올린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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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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