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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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개혁교회의 책임    
(제54회기 목사. 장로기도회 주제 강연)
             
정일웅목사(전총신대학교총장)

장소: 부산부전교회당
일시: 2017.5.10. 9:30-10:30    

존경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의 목사님과 장로님 여러분, 주안에서 다 평안하신지요? 저는 오늘 “종교개혁 500주년, 개혁(장로)교회의 책임”이란 주제 강연을 부탁받은 정일웅목사입니다. 강연주제의 핵심은 혼미한 이 시대에 우리 개혁교회가 짊어져야 할 막중한 복음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밝혀달라는 총회의 요구를 받게 되었고, 그 대답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의 깊은 관용(寬容)과 혜안(慧眼)의 경청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우리 개혁(장로)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려면, 아무래도 우리 합동교단을 비롯하여 현재 경험되고 있는 한국교회전반의 목회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먼저 그 방향에서 대화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합동교단, 지도자 여러분,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장로/개혁)교회는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큰 위기에 직면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 대부분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간 한국교회가 지난 60-90년대로 오면서, 대대적인 복음전도운동으로 선교역사상 유례없는 대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 그러한 성장의 황금기는 지나간 듯합니다. 80년대 초만 해도, 어디든지 십자가만 세우면 교회가 부흥된다던 말이, 이제 다 옛 이야기가 된듯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결코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급변하는 우리사회의 한복판에서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물질적이며, 타락한 인간의 세속적인 가치들에 더 귀를 기울이고, 행동했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속화된 모습이며, 하나님의 거룩성을 상실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의 모습임을 자책해 봅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이전 같지 않고, 목회하기 또한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매우 불신 받는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매번 교회 내적인 문제들이 세상 밖으로 노출되면서, 한국교회지도자들의 비인격적이며,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세상언론을 장식하게 되었고,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불신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안티 기독교세력까지 등장하여, 적그리스도의 노릇을 하고 있으며, 또한 가나안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 그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그래도 대형교회들은 성장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곳을 찾는 대부분은 이전 교회들에서 상처받아 수없이 갈등하며 배회하던 우리 평신도들의 수평이동현상으로 설명될 뿐입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한국교회의 목회실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은 우리의 자업자득이 아닌가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그야말로 위기와 한계에 직면한 모습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단 지도자 여러분, 이러한 한국교회 목회실상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참으로 지금이야말로 많은 신학적인 성찰과 목회실제의 철저한 반성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실제를 되돌아보고, 500년 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것처럼, 우리의 왜곡되고 뒤틀린 부분을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부단하게 고처 가는 노력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가 가진 신학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가 참으로 좁아져 있지 않은지? 그 좁아진 우리의 모습에서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부정적인 문제들이 연유된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재빨리 좁아진 우리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기를 감히 주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때, 개혁(장로)교회가 짊어져야 할, 복음의 책임이 거기서 확인될 것이며, 나아가 참된 복음의 진리를 책임지는 우리 한국개혁교회의 모습이 거기서 가능하리라 기대하며, 또한 당면한 한국교회의 목회위기와 한계도 거기서 극복되리라 확신합니다.  

이제 저는 다음의 5가지 주제를 따라, 좁아진 우리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할 개혁교회의 책임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 합동교단 개혁교회의 신학정체성은 ‘개혁신학’으로 부르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의 신학정체성의 명칭은 주로 ‘개혁주의’ 또는 ‘개혁주의신학’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언어사용은 피하고, ‘개혁신학’으로 바로 잡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주의’(-ism)로 불리는 ‘이념’, 즉 ‘Ideologie’란 말이 가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며, 그 개념자체 역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아시지요? 그것은 “경험을 통하여 획득한 가치를 객관화하고 합리화하여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소리”로 봅니다. 물론 ‘사상체계’란 말로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어쨌든 인간의 경험에 의존된 사람의 생각이며, 사람의 주장이기에 그 자체는 참된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Evangelium)과 이념(Ideologie)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고 질문하면,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언제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인격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너무 이념적으로 강조하여, 그것을 믿어야 할 대상으로 삼게 되면,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그 믿음은 이념을 믿는 모습이지, 주님의 참된 말씀을 믿는 종의 모습이 아니며, 오히려 이념의 종, 아바타의 모습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니, ‘개혁주의신학’이란 용어는 오늘 이 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 개혁교회의 신학정체성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신학이념표현은 그간 기독교신앙진리에 대항하는 이단사상이나, 신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사상이 대두될 때, 진리방어목적으로 주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일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훌륭한 생각들은 성경의 진리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칼빈의 신학을 선호하고, 지금도 ‘칼빈신학’란 이름으로 공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리이해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의 객체(대상)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러한 신학이념이 가장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금 달리 생각하는 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망각하고, 마녀사냥식의 도구가 되었던 것 때문입니다.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를 경험한 구미교회들은 오늘날 이념적인 신학사상표현을 극히 자제하며, 그러한 언어사용을 피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하나 말씀드리면, 실제로 총장재임 시에 서유럽과 북미지역의 우리 총신과 신학사상을 같이한다고 생각된, 신학교총장들을 만나 교제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 아무도, 그들 학교와 자신들의 신학을 우리와 같은 이념신학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 칼빈신학교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들은 그들 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을 모두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또는 개혁교회의 전통(Reformed Tradition)으로 표현하지, 결코 이념신학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혁주의’는 영어로 ‘Reformism’,‘개혁주의신학’은 ‘Theology of Reformism’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그런 용어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이 말은 순전히 한국교회의 사상 대립적 상황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이념적인 신학표현은 자제하고, 그냥 ‘개혁교회의 개혁신학’으로 부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총신의 신학정체성은 ‘개혁신학’이며,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신학교입니다. 이런 표현가운데 사상체계는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조직신학의 책임). 그렇게 표현할 때, 사회적으로 복음전도의 접근이 더 용이하며, 특히 지성인들에게 투쟁적이거나, 분파적이지 않고, 편 가르기가 아닌, 더 설득력을 가진 복음전달이 가능하리고 봅니다. 그런데 또 최근에 ‘복음주의’라는 주장의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도 매우 이념적인 표현이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복음’은 복음이지, 복음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한 표현은 훨씬 교회공동체의 화해와 화평과 하나 됨을 깨는 일에 크게 기여하리고 봅니다. 더욱이 이념적인 신학사상표현이 정치적인 구호로 사용되는 일은 더더욱 삼가야 합니다.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정말 복음보다, 이념을 더 믿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말씀하였습니다. 구원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믿음대로 행하는 순종이요, 인격적인 삶의 실천임을 일러준 것입니다. ‘개혁주의’, 또는 ‘개혁주의신학’이란 용어사용이 때때로 그를 대단한 개혁주의자로 여기게 할지모르지만, 자기과시행위일 뿐입니다. 여러분, 지나친 신학이념의 주장에서 제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그리스도복음의 진리는 이념적인 주장에서부터 왜곡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신학정체성은 ‘개혁신학’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분명히 할 때, 한국의 개혁교회는 한국교회전체를 품는 장자교단의 역할을 거기서 분명히 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둘째, 개혁교회의 책임은 개인의 영혼구원뿐 아니라, 사회와 자연생태계의 윤리적인 책임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삶을 구원하는 복음전도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단 지도자여러분, 현대신학은 기독교구원이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전인격적인 구원과 삶 전체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특히 사회와 자연생태계의 윤리적인 책임까지를 포함한 우주전체구원의 총체적인 의미가 그리스도복음의 핵심적인 구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하나님나라와 종말론적인 메시아구원관). 생각하면, 그간 이러한 총체적인 구원이해를 우리 보수적인 교회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단정하여 그 수용을 거부해 왔습니다. 물론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그들의 성경유오설주장과 만인구원론신학입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의 보수는 개인구원을 강조하며, 진보는 사회구원을 강조하여 서로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 문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복음의 전인격적이며, 삶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새롭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개혁교회의 구원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과 하나님, 개인과 사회, 개인과 자연까지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창조세계의 구원(창1:28;눅10: 25-37;롬8:19-23)을 폭넓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 사회문화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통치)이 드러나게 해야 하는 문화신학적인 사명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의 빛을 비추는 사명수행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코메니우스와 카이펴의 문화신학). 이러한 이해는 신학적으로 그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했던 전통적인 구원론을 뛰어넘어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구원을 새롭게 해석해 준 통전적인 구원론으로 여겨집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구원은 구체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서, 먼저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의 전인격적인 변화(회개와 믿음의 중생, 칭의)가 있어야 하며, 그렇게 변화된 사람(영혼구원의 확신)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복음의 윤리적인 책임(성화)을 짊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실재로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즉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로써, 기독교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서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도, 방관자가 아니라, 책임자로 참여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학에서도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란 이름으로 더 잘 설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론은 전인구원적이며,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윤리적인 책임까지를 포함한 총체적인 구원을 우리의 성장세대와 평신도들에게 깨우치거나, 그렇게 잘 인식시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는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목표를 두었고, 신앙의 윤리는 하나님사랑의 경건윤리에만 역점을 두어, 우리 모두 경건해지도록 종교심과 기복신앙을 얼마나 부추겨 왔었습니까? 그리고 설사 이웃사랑의 책임을 알려주었다고 해도, 그것은 천천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우 인색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자기영혼구원만 생각하는, 마치나 한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생활하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의 판단이 오해이기를 바랍니다만, 실제로 우리 모두 그간 영혼구원에만 목숨을 걸었고, 영혼만 구원되면, 이웃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봉사)은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 기독인들이 사회로부터 불신 받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웃과 사회에 대한 복음적인 사명은 망각한 채, 불신자들과 똑 같이 아옹다옹하면서, 오직 자기 것 획득에 몰두하면서 살아온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음을 깊이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이제 우리의 참으로 좁아진 구원관을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유주의라고 또 오해하지 마시구요! 우리의 ‘영혼구원의 과제실현’이 얼마나 이웃공동체를 사랑해야하는 일과 맞물린 것인지를 되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복음의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삶을 감당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참으로 책임지는 개혁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전도방법을 새롭게 시도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교회의 주변과 사회저변에 소외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복음전도를 과감하게 시행하며, 그들을 돌보는 목회사역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야말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고 품어주는 이웃사랑 복음전도, 사람사랑의 목양사역으로 전도와 목회방향을 새롭게 바꾸기를 바랍니다.(중서울노회 소속인 옥수중앙교회 호용한 목사님의 우유배달사랑전도/달동네의 울보목사란 책). 
우리사회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복음전도와 목회행위가 비록 재빠른 교회성장을 초래하지 못하고, 성장열매가 참으로 더딜지라도, 이러한 전인구원의 복음전도, 전인구원의 총체적인 목회를 실천할 때, 우리 개혁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참으로 우리의 좁아진 구원신학에 대한 사고와 이해의 지평을 활짝 넓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총체적인 복음의 폭넓은 구원관을 토대로, 복음전도와 목회를 실현하기 바라며, 또한 우리의 젊은 세대와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총체적인 복음의 전인격적인 구원관을 심어주기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개혁교회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폭넓게 감당하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것이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는 우리의 평신도들을 만날 것이며(마5:13-16), 사회와 이웃에 감동을 주며, 마침내 하나님을 감동시켜,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들로 교회부흥(행2:47)을 이루는 놀라운 기적을 거기서 경험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개인의 영혼구원은 오직 성령하나님이 행하시는 독자적인 일이지만, 이웃과 사회와 자연을 돌보는 총체적인 구원의 책임수행은 신인협동적인 관계에서 성취해야 할 인간의 책임이며,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원’임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개혁교회는 평신도의 만인사제신분을 회복하고, 그들 평신도들이 창조세계의 한 복판에서 복음전파와 사회봉사에 적극적인 섬김의 주인공들로 활동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로마가톨릭교회가 성직자의 신분과 권위를 높이고, 계급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신도(Laity)신분을 낮추어 신적인 일에 무식한자들로 소외시키고 있을 때, 루터는 벧2:9-10절의 말씀을 들고 나와, 성직자만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동일한 사제신분을 가진 자들임을 천명함으로써, 교회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사제론’은 인간사제의 중보자적인 역할 없이, 믿는 자라면 누구나 중보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직접나아가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제자격이 부여되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전도에서 선지자로서의 기능적인 역할과, 형제를 위로하며 돌보며, 축복하는 기도자의 제사장적인 기능과 사회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일에 섬김의 왕적인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루터의 이러한 만인사제론은 그 당시 성직자 중심의 중세교회구조를 개혁하여, 회중중심의 교회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중심의 교회로 개혁하였습니다. 칼빈은 루터의 만인사제론을 수용하면서도, 조직된 교회를 섬겨야 할 직분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고(목사,교사,장로,집사), 한국장로교회는 3가지 직분(목사,장로,집사)을 항존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직분은 결코 계급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령께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세우신 직책이었습니다. 이 직분은 주님을 섬기는 직분이지, 목사를 개인적으로 섬기는 직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는 이러한 직분들이 목사를 섬기는 직책인 것처럼, 오해되어 있고, 또한 매우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는 언제부터인가 목사직분의 권한이 강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 그 권위가 높아지면서, 마침내 목사는 신령하고,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로, 또한 축복의 전문가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기복신앙의 추종자들로 만들었고, 피축복자들로 전락시켜 놓았습니다. 또한 목사의 권한은 당회장권, 강단권, 축도권, 설교권, 목양권, 안수권 등으로 강화되었고, 상대적으로 평신도는 오늘날 참으로 무능한 신자로만 머물게 해 놓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 중세로마가톨릭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그리고 목사의 리더십은 섬기는 주님의 종의 모습이 아니라, 성도들 위에서 지배하고 군림하는 제왕(기업체회장)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었고, 마침내 목사의 교권남용문제가 여기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목사의 교회재정횡령, 목회세습, 목회자성윤리문제 등, 비도덕성문제들이 다 이와 같은 제왕적인 리더십의 남용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이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교회 내적으로, 목사와 장로, 그리고 평신도사이에 발생하는   불화와 대립적인 분쟁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는 줄 압니다. 목사님들 모임에 가면, ‘장로다루는 법’이 인기 있는 특강주제라고 하며, 장로님들 모임에서는 역시 ‘목사잡는법’이 인기 있는 강연주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웃자고 만들어낸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사실이라면 참 안타까운 목회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일반법정의 수많은 고소건과 시비 건이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분쟁들이며, 목사. 장로사이에 발생한 고소 건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우리교단은 총회의 결의까지도 효력정지를 당하는 사태가 빈번한 줄 압니다. 

존경하는 교단 지도자 여러분, 저는 이러한 행위들에서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불신당하는 연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이 생산되는 원인도 여기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복음전도의 문이 닫히고, 교회성장이 멈추어진 이유가 다 우리의 기득권을 움켜지고, 아옹다옹 하는 모습에서 귀결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교회공동체의 평안을 위해서 자기주장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여러분, 왜 우리스스로 교회의 거룩성을 짓밟으며, 왜 하나님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지요? 지금이라도 이 모든 수치스런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즉각 중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권징의 권위를 시급히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문제를 교회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법정으로 끌고 가는 분들이 과연 개혁교회의 멤버이며, 하나님나라를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개혁교회의 동역자인지를 심각하게 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천국열쇠인 교회의 권징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감정적으로 남용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 모두 교회의 치리와 권징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주님께 대항하는 불신앙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개혁교회는 권징을 올바르게 시행하여, 주님교회의 권위를 바로세우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존경하는 개혁교회의 목사님들, 이제 우리의 장로님들과 평신도들도 사제의 신분을 가진 자들임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역교회 내에서의 일꾼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세상의 한 복판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일로, 사회와 자연의 윤리적 책임영역에서 적극적인 섬김으로 활동하는 주인공들이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가진 직업을 통하여 창조세계의 한복판에서 만인사제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전도의 사명수행과 이웃사랑의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이 거기서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그 당시 만인사제론을 말할 때, 목사와 평신도의 직분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질문 받았고,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는 지역의 교회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선택되고 준비된 하나님사역의 책임자이며, 특히 예배에서 하나님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성례를 거행하는 책임과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양적인 책임을 성령께서 부여하여,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역시 이러한 목사를 세우신 성령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단지도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목사와 장로, 또는 평신도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함께 세워가야 할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목사님은 지역교회공동체를 책임진 사제들이며, 평신도들은 세상을 책임진 사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교회는 평신도의 만인사제직을 인정하고, 그들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꾼의 책임을 당당히 감당하도록, 우리의 평신도들을 격려하고, 다시 깨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들 평신도사제들이야말로 이시대의 모든 직업 활동을 통하여, 우리 사회를 복음으로 이끌어가야 할 기독인리더 들입니다. 생각하면, 이들 평신도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꾼들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이웃사랑과 사회개혁과 자연생태계보호 등의 사회윤리적인 책임을 감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진리의 빛을 비추는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이며, 바로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 보이는 ‘영광스러운 일’이 분명하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간 상실된 한국교회의 거룩성과 신뢰성을 회복시켜야 할 주인공들도 분명히 이들 평신도사제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개혁교회는 모든 평신도들이 그리스도복음의 총체적인 전인구원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시대의 복음사역에 헌신하는 신앙실천의 인물들이 되도록,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을 일깨우는 성경교육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목사님들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며 목회하고, 목회하면서 배우는 개혁교회의 목양적인 책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인격적인 기독신앙인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개혁교회신자들을 이러한 신앙적인 삶으로 응답하며 교회와 세상을 섬기며 사는 복된 자들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이 얼마나 믿음, 소망, 사랑에 연결된 것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일깨우는 개혁교회의 목회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존경하는 목사. 장로여러분, 기독교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하는 실천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전13: 13)고 하였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살전1:2-4절에서도, 바울은 복음전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는 3가지 모습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고,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이며, 또한 택함 받은 증거라는 사실도 밝혀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히10:19-25에서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교회를 통한 목양사역이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과 얼마나 연관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을 가장 잘 계승했던 인물은 교부시대의 유명한 신학자 어거스틴(A.Augustinus)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경배할 때, 믿음, 소망, 사랑으로 찬양하라”고 예배의 본질적이며, 실천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도, 여기에 목표를 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쓴 ‘요리문답교육지침서’(Enchiridion)에서는 ‘믿음’을 일깨우려면 ‘사도신경’을, ‘소망’을 일깨우려면 ‘주기도문’을, ‘사랑’을 실천케 하려면, ‘십계명’을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이래로, 믿음, 소망, 사랑은 요리문답교육에서 언제나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과 연결하여 교회신앙교육의 근본토대로 삼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요리문답교육(루터/칼빈)을 그대로 계승하여, 교회신앙교육의 훌륭한 전통을 남겼습니다. 특히 칼빈은 그것을 중심하여 매 주일 오후예배에서 반복적으로 행하여야 할 교리설교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보헤미아-모라비아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코메니우스(J.A.Comeni- us)는 그의 유명한 책 ‘대교수학24장’에서, 성경공부의 목표는 믿음, 소망, 사랑에 두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66권의 내용이 이 세 가지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올바른 기독교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구원계시의 핵심이요, ‘정경 중에 정경’(Canon im Canon)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우리 개혁교회 지도자여러분, 이러한 신앙본질의 이해를 종합할 때, 믿음, 소망, 사랑이야말로 바울의 구원신학의 핵심이며, 교회를 통하여 실현해가야 할 실천신학(성경교육)의 근본토대요, 전도신학의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은 우리 목사님들이 재교육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오리엔테이션’ 해야 할 중요한 구원신학과 목회신학의 핵심주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적인 신앙의 핵심사상이 우리 개혁교회에 와서 지금 실종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의 교리만 강조하고, 구원신앙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히 깨우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보수주의는 포기하기 바랍니다. 오히려 말보다 믿음을 행동하며, 실천하는 보수주의가 되기 바랍니다. 또한 구원 얻음의 실체가 믿음의 근거와 열매로서 이 소망과 사랑과 얼마나 깊이 연관된 것인지를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은 오늘날 우리 개혁교회가 짊어져야 할 성경교육의 실제적인 목표이며, 내용이며, 수단이며, 또한 복음전도와 목회사역을 꽃피게 할 실천신학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이 목회자재교육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오리엔테이션을 해야 할 구원신학과 목회신학임을 분명히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이야말로 오늘 우리 개혁교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구원신학이요, 전도신학이며, 목회신학이요, 실천신학의 근본토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개혁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을 성경교육의 전체목표로 삼고, 성도들의 신앙 일깨우기에 전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도, 믿음, 소망, 사랑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교하는 도구로 삼기 바라며, 그것을 주일예배의 목표로 삼아, 그러한 구도를 따라 예배를 시행할 때, 더 이상 은혜를 끼쳐보려고 갖은 방법으로 애쓰지 않아도,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를 회중은 크게 경험하리라 확신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개혁교회의 막중한 책임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세요? 역시 그것은 목회자재교육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목사님들이 다시 진리 앞에 머리를 숙이고, 겸손히 복음을 배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 저변 곳곳을 한번 돌아보세요! 더 이상 한국교회가 이 상태로 주제 앉게 할 수가 없다는 심정으로, 우리 젊은 목회자들이 그룹별로 모여서, 스터디 하는 모임이 자발적으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설교크리닉’이란 이름으로, ‘율법과 복음’이란 주제로 구원론을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옛날,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오늘 목회현장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목사님들이 스스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 우리 개혁교회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안합니다만, 총회목회대학원이 원래 우리 총신교단 목회자재교육기관으로 설립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최근에 운영되는 모습은 겨우 타 교단목사 본 교단 가입시키는 편목교육기관으로 전락된 모습입니다. 이전 총장재임 시에 제가 목사재교육과정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우리교단목사님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해보자고 운영위원회에서 수차례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라기로는 앞으로 총신 졸업 후, 7년이 지나면 반드시 목회자재교육과정에 다시 모여, 적어도, 1개월 정도의 연수과정을 실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장로님들을 위한 지도자연수과정도 제공해야 합니다. 총회가 너무 비대하여 움직이기 힘들면, 각 지역노회들이 서로 연합하여 목회자재교육과정을 자체적으로 각각 운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발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미국의 무슨 디민 학위프로그램과는 절대로 연계시키지 마시고, 목사와 장로의 직분명칭이 그 어떤 학위 명칭보다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최고의 성직임을 기억하시며, 목양사역에 필요한 목회정보와 성경연구와 목회전략과 리더십을 훈련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저의 충정어린 심정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이 시대는 배우면서 목회하고, 목회하면서 배우는 평생교육의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지도자 여러분, 시간을 선용하여, 그간 잘못배운 구원론이해를 새롭게 회복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개혁교회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게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 중에, 특히 이‘소망’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루터의 칭의 론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믿음대로 행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신앙태도가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루터의 칭의론이 한국교회에서 값싼 은혜가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언약백성들이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칭의는 마지막 심판 날까지 유보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주장은 이웃사랑에 너무 인색하고, 행동실천이 없었던 한국교회의 이기적인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도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선행(사랑)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소망을 함께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신칭의의 은혜는 또다시 왜곡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행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선행의 공허함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 문제는 선행의 대가요구에 대한 질문으로, 그것은 세상의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가 약속한 하늘의 상급에 있음을 전제해야하기 때문입니다(창15:1,17:1,마6:9-13;계20:6).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구원신앙은 믿음과 선행만을 강조하는 이원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믿음, 사랑, 소망의 올바른 삼각균형과 조화를 가진 전인격적인 삶의 모습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개혁교회는 그러한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에 바탕을 둔 신앙인물을 길러내는 성경교육과 신앙교육의 책임을 지금 짊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잘 감당할 때, 현재 직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목회사역의 한계가 거기서 극복될 것이며, 한국교회가 새롭게 부흥되는 시대로 도약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개혁교회의 책임은 한국교회연합운동의 과제를 기꺼이 짊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역에 세워진 건물로서의 교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약백성들의 영적인 신앙공동체의미가 더 귀중합니다. 칼빈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를 구별하면서,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가진 불가시적인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나누어진 모습인 교단과 교파의 의미는 매우 좁은 교회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신자들이, 한 형제자매임을 인정해야하며, 오늘날엔 성도의 교제(Koinonia)가 교파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면,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 교회연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 시대적으로 연합을 가장 많이 힘썼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정신을 따르는 우리 개혁교회는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개혁교회 본래의 모습이요, 책임입니다. 이제 교파를 뛰어넘어 한국교회가 연대하여 이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책임지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KNCC는 우리사회의 정치민주화를 이루는 일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신학과 종교다원주의적인 신학고수로, 한국교회의 다수인 보수그룹과 연대하지 못해서, 그 역할이 끝난 것 같습니다. 한기총은 미안합니다만, 그동안 보수교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다가, 이상하게도 교회의 거룩성과 권위를 상실한 불신 받는 종교단체로 전락된 모습입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한국교회총연합회’란 새로운 연합기구(한교총)의 탄생소식에 저는 개인적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7개 기존교단들이 그들 각각의 역사와 현재를 존중하고, 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더 큰 주님의 일들에 힘을 합하기 위해 연대하게 된다니, 참으로 기대됩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삼삼사오로 분리되어 서로 경쟁하다보니, 힘을 잃고 있었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들에 한목소리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해, 우리사회의 혼란에 기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한 교파로의 통합이 아니라, 독립된 각각의 교단을 존중하고, 하나의 협의기구로 연대하면, 우리사회가 분열되지 않고 통합되는 사회적인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며, 남북통일에도 기여하리라 기대합니다. 참으로 한국교회가 대 사회, 대 정부, 대 북한, 대 국제관계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잘 수행해 주기를 바라며, 그렇게 할 때, 우리사회의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도 곧 회복될 것입니다. 물론 신학정체성이 빈번히 질문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념적으로 주장되었던 ‘개혁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적인 개혁신학’과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전통이 한국교회연합에 분명한 빛을 발휘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또한 한국교회 전체를 품는 장자교회의 모습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제 강연을 마치려 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개혁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여러분, 아무쪼록 그간 우리의 참으로 좁아진 이념신학과 구원론과 직분론과 성경교육(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과 교회론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의 폭을 활짝 넓혀서, 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개혁교회의 막중한 복음적인 과제와 책임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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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개혁교회의 책임- 정일웅목사(전총신대학교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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