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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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철 목사한테 아쉬운 것은
환경이 10배는 더 좋아졌는데
천 명이 넘는 교회를 이삼백 명
모이는 교회로 만들어
 
미국에서 사업가로 편히 살기보다
어려운 교회목회와 완전 장학 제도
신학교 운영의 꿈을 꾸고 있다
그래서 그는 LA Dreamer 고귀남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 수록곡 ‘별들의 도시’(City of Stars)는 이렇게 시작한다.
 
“별들의 도시여, 넌 나만을 위해 반짝이는가... 난 느꼈어. 당신과 나눈 첫 포옹에서 우리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질 거란 예감을.”
 
이 별들의 도시는 천사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미국 LA를 지칭한다. 이 영화의 감독 차젤레는 “꿈과 열망의 힘으로 살아가고 이 때문에 함께하기도 또 헤어지기도 하는 드리머(dreamers)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굵직한 영화 제작사가 몰린 이 도시는 수많은 감독·배우·음악가 지망생으로 언제나 북적인다. 차젤레 감독이 바라본 LA는 “예술과 창작을 향한 열정과 꿈이 부서지고 태어나길 반복하는” 곳이다. 이 LA에 그들 말고도 요셉같은 드리머 목사(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창세기 37:18-19)도 있다.
 
2017년 2월 2일 미국시간으로 수요일 오후 6시 30분 11년째 살고 있는 LA의 언약교회에서 내가 설교를 한 수요예배 후 사무실에서 고귀남 목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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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신문에 인터뷰하신 적도 있으셨다면서요.
“인터뷰라기보다는 이길환 기자의 이민 목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죠. 그때는 미국에 9년째 살고 있을 때였죠. 그래서 이민 목회의 상황을 아는 대로 말을 한 기억이 나네요. ‘한국에서 온 이민 목회자들에게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수한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래도 세계교회가 인정하는 하나님 중심의 순수 신앙이 한국교회에는 남아있으니 복음적인 한국교회의 전통을 이제는 신앙이 무너져 가는 선진국에 다시 심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뭐 간단한 말이었죠.”
 
-고향은 어디세요.
“충청남도 부여입니다. 부여의 어린 시절 빨간 우체통 널찍한 평상 처마 밑 외등 녹슨 자전거와 리어카 그리고 이 모든 풍경을 든든히 지키고 선 나무가 그림처럼 생각나요. 소박해서 더 애틋했던 시절 저희 집안은 딸만 여섯이고 제가 일곱째입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고 목사가 문을 여니 사모님이 쟁반에 받친 둥글레 차를 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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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서 ‘더굳뉴스’라는 신문사를 합니다.
“아 그러세요.”
 
-LA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님 통해 소개를 받았습니다. 참 훌륭하신 목사님이시죠.
“한국에 계시는 목사님들이 박헌성 목사님을 좀 가까이 지내라 말들을 많이 하시더군요. 저는 사실 미국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제가 박헌성 목사님한테 마음을 주고 가깝게 지낸 게 4년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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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는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부여 임천면이 있어요. 부여에서 19킬로 더 시골로 들어가면 임천중학교도 있고 임천고등학교도 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여고등학교도 못 갔습니다. 임천중학교를 나와 공부는 좀 해서 유한공고를 합격했습니다. 사실 거기는 기숙사비만 있으면 되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님이 기숙사비도 걱정이 되시니까 포기하라고 하셨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생 가야할 시기에 돈이 없으니까 직장생활을 하려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당시 목동이라는 데에 크라운제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들어간 날 일하면서 베벨기어(회전력을 평행하지 않은 축 방향으로 전달하는 삿갓 모양의 기어)에 손가락 넷이 잘렸습니다. 그 기어는 좌회전을 우회전으로 바꾸는 것인데 과자가 익혀 나오면 아주 뜨겁습니다. 과자가 베벨기어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회전 해 가는데 기어에 과자 부스러기가 있어 그걸 청소하려다 사고가 났습니다. 장갑을 끼고 해야 하는데 입사 첫날이라 없으니까 옆의 여직원이 자기 것을 빌려주었습니다. 장갑 낀 손이 기어에 물리면 장갑에서 손만 빼면 되는데 순간적으로 그게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장갑을 틀어 뽑으려는 사이에 집게손가락이 베벨기어에 물리고 만 것입니다. 이 왼손 여기가 가루가 돼버린 겁니다. 열다섯 살에 그랬죠.”
 
-그 뒤 어떻게 됐습니까.
“그래가지고 경희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모태신앙이긴 했지만 그때 주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제 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체험도 했습니다. 은혜 때문에 뒹굴기도 했습니다. 수술도 여러 번 다시 했죠. 두 손가락이 살아났는데 이 새끼손가락이 주님을 본 증거입니다. 목사가 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누님들이 풀빵을 구워 팔며 나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임천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주 시골입니다. 거의 학비가 없는 시골 학교였습니다. 그 뒤 라보도 신학교를 잠시 거쳐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님을 소개로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입학원서를 쓰고 반고소 고려파 신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가 청와대 근처에 있다가 동도교회 교육관도 사용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굉장히 큰 신학교가 됐죠. 지금은 반고소 고려파 신학교는 성경찬송만 가지고 가면 공부를 그냥 시켜주죠. 사실 그게 제 꿈입니다.”
 
-그게 몇 년도입니까.
“그게 79년도부터 4년을 거기 다녔습니다. 그 신학교가 삼각산에 있을 때 입학하고 동도교회에 있을 때도 다녔고 청량리로 옮겼을 때까지 다녔습니다. 그 뒤 학교를 지었죠. 그때는 석원태 목사님이 큰 교회를 짓기 전이었습니다. 제가 당시 4년 동안 학생회 회장을 했습니다. 제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석원태 목사님이 직접 임명을 하셨기 때문에 투표도 없어서 가능했습니다. 제가 신학부는 사당동 극장에 있던 비주류 신학교에 들어가 3년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최의원 교수가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최의원 교수님이 제가 2학년 때 총장님으로 오셨죠. 제가 군대를 안 가서 1984년도였을 겁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3년 내지 4년 빠릅니다. 제가 꿈꾸는 학교는 반고소 고려파 유형의 학교입니다. 성경 찬송가만 가져오면 7년 무료로 할 수 있는 신학교를 운영하고 싶습니다. 학비 내는 것은 제 취향에 맞지 않습니다.”
 
-언제 안수 받으셨습니까.
“저는 84년 4월 16일 받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비주류 박요한 목사 측에서죠. 마포중앙교회에서 받았죠.”
 
-하귀호가 있는 동인천노회로는 언제 들어왔습니까.
“그 뒤 7년 지나서였을 겁니다. 90년도로 기억됩니다. 하귀호 목사가 큰일을 하려면 합동 측으로 와야 된다고 권해서 그렇게 된 거죠. 우리 교회가 인천에서 크고 제가 사업을 하니까 인천 지역에서는 대우를 받았죠. 목사님들과 어울리지 않고 일반 사업가들과 많이 어울렸죠. 구청장 국회의원 사업가들하고...”
 
-그러면 개척하신 교회가...
“언약교회죠. 인천시 남구 용현 5동에 있었습니다. 그 땅은 제 손가락 잘린 보상금과 제 아내 결혼 자금을 합쳐 교회 부지를 샀습니다. 교인 한 명도 없을 때죠. 제가 신비적인 성향이 있어 합동 측과 안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한얼산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하는데 이 땅의 환상을 보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사게 되었는데 당시는 낙섬이라는 섬이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의 산이었죠. 낙섬이라는 조그만 언덕이었죠. 지금은 매립이 되어 다 없어졌죠. 바다가 육지가 되었으니까요. 용유도와 영종도 사이에 있던 바다는 메워져서 거대한 공항이 생겼으니 그 사이의 낙섬과 소원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게 당연하죠. 그 낙섬을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 주셔서 거길 가게 되고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개척한 지 한 5년 되니까 그 주변이 거의 다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한 주에 새신자 최고 기록이 50명 등록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금호아파트 영락아파트 부성아파트 하여튼 아파트가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그게 지금 개발하는 송도 입구입니다. 경인고속도로 끝나는 지점 그리고 제2고속도로 출발하는 곳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요지죠. 사실 내가 배재철 목사한테 아쉽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은 제가 있을 때보다 환경이 10배는 더 좋아졌습니다. 그런데도 천 명이 넘는 교회를 이삼백 명으로 줄여놓고 그랬으니 솔직히 아쉽고 어떨 때는 가슴도 아프죠.”
 
-그게 몇 년 된 겁니까. 교회 이름도 언약교회에서 새소망교회로 바꾸고 노회도 동인천노회에서 용천노회로 옮겼던데요.
“정확히 기억났는데 2003년도였습니다.”
 
-그러면 2001년도 쯤 떠났습니까.
“아닙니다. 2003년도였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떠난 것도 그 해였습니다. 한 달 사이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5억을 받고 공동의회를 한 뒤 진짜 하루도 틀리지 않은 한 달입니다. 공동의회 1차 2차 서류를 저희 집에 다 가지고 있습니다. 딱 한 달 만에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 할 수없이 제가 포기한 거죠.”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저를 키우신 목사님이 곧 개척시대가 지나갈 터이니 빨리 개척하라고 해서 신학교 1학년 때 제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79년 3월 25일이었습니다. 그때 설립예배 설교자로 석원태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양가 허락을 받고 지금 제 아내를 만나고 있을 때인데 그 날 석원태 목사님이 양쪽 집안에 얘기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한국 기독교 교회 설립 200년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교회를 개척한 인물로 고귀남 전도사를 만들고 싶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하면 목회 연수(年數)에 안 들어가니 결혼을 시켜야 한다고 권면을 하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 24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양가 집안 앞에서 석원태 목사님이 약혼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교회 성장은 얼마나 걸렸습니까.
“개척 5년 뒤인 83년에 꽉 차기 시작해서 일천 번제를 마친 4년 동안 성장이 계속된 것 같습니다. 제가 3년 동안 외박하지 않고 교회 강단에서만 일천 일을 보냈습니다.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고 밥 먹고 화장실 가고 학교가는 것만 제외하고 교회 강대상에서만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막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온 지 11년 만인 작년 2016년 11월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2백만 불 상당의 건물을 소유한 언약교회를 목회하고 있다. 그는 살기 좋은 미국에서 아무런 꿈도 없이 편히 살기 보다는 어려운 이민교회 교인을 성장시키고 전액 장학생(full scholarship)의 신학교를 운영하는 꿈을 꾸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 LA preacher 고귀남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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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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