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One of the most famous of the surviving Byzantine mosaics of the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jpg
Byzantine mosaics of the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

제국과 교회

아무리 일해도 배고픈 게 싫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시류에 맞춰 쌀 배달부에서 싸전주인으로, 운수업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해방이 되자 건설회사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끈질긴 빈대처럼 끈기도 있었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빈대처럼 여기저기 빌붙기도 잘했다.

이제 얼굴에 검버섯은 군데군데 피었을지라도 세계가 알아주는 한국 제일의 재벌이 됐다. 새해 벽두에 그가 카랑한 목소리로 정가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말인즉 이승만 대통령의 제2공화국 때는 형편이 여의치를 못했단다. 그렇지만 박정희 장군의 제3공화국 때부터는 제법 돈푼께나 만지게 되었단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우정 높은 분 사시는 청와대에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 인사를 드렸단다.

그런데 재벌이 된 농부의 아들이 돈 보따리를 갖다 바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꽤나 대통령 덕을 많이 봤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집권자가 덕수궁 돌담 옆에 있는 정동교회에 주일마다 꼬박꼬박 출석하는 교인이었다. 그래서 어느 공공기관에서건 기독교의 이런저런 일들에 퍽이나 협조적이었다.

콘스탄틴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꿈으로써 교회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도시는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에 아주 좋은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육로로 유럽과 아시아를 해로로 에게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차점에 있었다. 이를테면 천안삼거리인 셈이었다. 예전에 그 도시를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콘스탄틴은 그걸 자기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했다. 터어키인들은 그걸 이스탄불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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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yzantine Empire under Manuel I, c. 1180.

그곳은 새 로마로도 불리웠다. 옛 로마는 더 이상 수도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황제도 없었다. 따라서 로마의 교황이 어떤 의미에서 황제의 후계자처럼 되어버렸다. 마침내는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의 감독 실베스터 1세한테 제국의 서쪽 지역 통치권을 하사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 이야기가 사실은 아닐지라도 일말의 진리는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제국의 위치에 버금갈 만치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택한 데는 보다 깊은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사정이 있었다. 사실 권력투쟁을 위해 진군하던 장군 시절에 십자가 환상을 얼핏 보았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가 십자가를 제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거대한 제국 내에서 바글거리며 살고 있는 온갖 잡다한 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종교가 하나 필요했었다.

콘스탄틴의 생각에 아주 급속하게 전파돼 아주 강력하게 성장한 그리스도교야말로 로마제국을 공고히 결합시켜 줄 접합체로 아주 안성마춤이었다. 어떤 시련에도 발전을 멈추지 않고 결속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틀을 다져주는 견고한 시멘트로써 최상의 종교였다. 유능한 정치가요 통치자인 콘스탄틴은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골조공사가 끝나 그리스도교로 옷 입은 로마제국 내에서 정작 시멘트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교가 내부에서 삐걱대며 금가기 시작했을 때 콘스탄틴의 당혹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202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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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7_ 제국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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