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web.jpg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

십자가를 짊어진 로마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거리는 캐롤로 술렁인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바삐 이곳저곳을 오간다. 소련에서는 상점마다 사람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고 붉은 용의 몸둥아리는 조각조각 흩어졌다. 제주도에서 시끌벅적하게 노대통령과 우정이니 뭐니 하며 돈을 우려내던 고르비도 조만간 구하기 힘든 영광 굴비마냥 역사 속으로 묻힐 모양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의 섧디섧은 박해를 종식시켰다. 콘스탄틴은 근 21년간을 로마황제직에서 몽기작거린 디오클레티안(재위 기간 AD 2백84년~3백5년)을 이은 황제였다. 콘스탄틴은 그냥 권좌에 덜렁 앉았던 게 아니라 오랜 각고의 투쟁 끝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애시당초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안은 한 사람이 통치하기에는 로마제국이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황제였다. 그는 홍당무를 동강내듯 분할 해 부목사같은 보조 황제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당회장 목사 같은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늙고 병들고 은퇴를 고려하게 됐을 때 보조 황제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보조 황제의 아들들끼리도 싸움을 이어받았다. 콘스탄틴은 한 보조 황제의 아들이었고 막세티우스는 다른 보조 황제의 아들이었다. 콘스탄틴은 지금의 영국인 브리튼과 지금의 프랑스인 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와 이태리를 꽉 쥐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로마로 진군했을 때 어떤 표징을 하늘에서 보았다고 한다. 해가 뉘였거리는 석양 무렵이었는데 태양 위에 빛으로 된 십자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이 표징으로 네가 이기리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교회는 콘스탄틴이 하나님은 분명히 아주 강력한 신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로마제국 내에서 당시 아주 막강했다. 콘스탄틴은 이 하나님을 승리의 기대를 안고 섬긴다면 승리는 따논 당상이 아니겠는가 하며 그는 무릎을 쳤다.
 
콘스탄틴의 생각과 믿음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지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후퇴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게 화근이었다. 티베르 강 위에 설치된 배로 만든 부교들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6.25 당시 한강 다리 꼴이었다.

군사와 말과 수레가 강과 부교 사이에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는 와중에 막센티우스 자신도 익사하고 말았다. 주후 3백1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밀비안 다리의 전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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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 

콘스탄틴이 이태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데는 다른 라이벌들과의 힘겨운 투쟁을 십 년 이상이나 겪어야 했다. 콘스탄틴이 힘이 미치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중단됐다. 이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콘스탄틴의 손에 로마제국이 완전히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교는 제국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종교가 되었다. 한 로마 총독의 명령에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의 예수가 로마제국의 구세주로 숭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불로 시련을 받았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와 혜택으로 시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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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astasis Pio Christiano Inv31525

당대의 동전이 그 변화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이교도제국의 동전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짜 맞춘 문자 PX가 으레 덧붙여 새겨지게 되었다.

세상은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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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5_ 십자가를 짊어진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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