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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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9년 제네바성경의 문답 형식 예정론

Lesson X
어떤 사람은 구원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에
Some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주여, 구원의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예배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시고 이틀만 더 은혜의 날을 베푸시어 믿음 열매들의 무르익음을 재촉하시고 진한 꿀물에는 마지막 회개가 스미게 하소서. 지금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섭게 더운 이 여름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더위 속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믿음과 뜨겁게 다투며 긴 변명으로 부채질할 것입니다. 혹간 태풍이 길을 잃은 날에는 강한 불안이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예정에 없던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마음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온통 붉은 여름일 때 말입니다.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단편 가운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주인공 명지는 남편 도경을 사고로 잃고 에든버러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후 ‘고통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던 ‘나’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은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겨질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법 알려진 관광지임에도 그는 관광 명소를 찾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지 않고 티브이를 켜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틀어박히다시피 한 그의 유일한 말벗은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앱이었습니다.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예의를 갖춘 이 앱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기계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라고 반문합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명지는 죽은 남편이 구하려 했던 학생의 누나한테서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습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습니다. 몸이 불편한 지용 누이가 서투르게나마 보내준 편지 덕분에 명지는 남편의 선택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신학자들이 어느 더운 날 모여 『바깥은 여름』에 나오는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남편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냐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예정파와 자유의지파로 패가 갈리어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어느 쪽에 가담해야 될지를 결정 못 하고 잠시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정한 그 신학자는 예정파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 쪽으로 갔을 때 예정파의 신학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이리로 보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내 자유의지로 여기 왔습니다.
예정파의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자유의지라니요. 이쪽은 당신 자신의 자유의지로 올 수 있는 데가 아니요. 다른 데로 가보시오.
그는 몸을 돌려 자유의지파 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 쪽에 끼어들려고 하자 누군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언제 당신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까.
그는 짜증난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습니다.
내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 쪽 사람들이 이리 보내서 왔습니다.
그들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쪽에 가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예정파와 자유의지파 양 쪽에서 다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예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어떤 공로를 나타내기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음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사도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8-30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롬 11:6-7

이 말씀에서 바울은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은 반면에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우둔하여졌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 이 세상의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더 나아가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4-5

이 말씀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예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여부는 현재의 믿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 창조 이전에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이고 믿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부르신 이유를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1항에서 칼빈은 예정론을 다음의 표제 하에 다루고 있습니다.

BOOK THIRD

CHAPTER 21

OF THE ETERNAL ELECTION, BY WHICH GOD HAS PREDESTINATED SOME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영원한(eternal itːrnl) 선택(election ilkn)에 대해, 그것으로(eternal election)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salvation sælvin)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destruction distrkn)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습니다(predestinate pridstnit).

The covenant of life is not preached equally to all, and among those to whom it is preached, does not always meet with the same reception. This diversity displays the unsearchable depth of the divine judgment, and is without doubt subordinate to God's purpose of eternal election.
생명의 언약(covenant kvnnt)이 모두에게 동등하게(equally ːkwli) 전파된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것이 전파된 사람들 가운데에도 동일한 입회허가(reception rispn)를 반드시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not always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다 The rich are not always happy.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차이(diversity divːrsti)는 신성한(divine divin) 심판(judgment ddmnt)의 헤아릴 수 없는(unsearchable nsːrtibl) 심원함(depth depθ)을 나타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목적을 확실히 중시하는 것입니다(subordinate sbːrdnit] ~ work to pleasure 일보다도 즐거움을 중시하다).

But if it is plainly owing to the mere pleasure of God that salvation is spontaneously offered to some, while others have no access to it, great and difficult questions immediately arise, questions which are inexplicable, when just views are not entertained concerning election and predestination. To many this seems a perplexing subject, because they deem it most incongruous that of the great body of mankind some should be predestinated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그러나 만일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spontaneously spntinisli) 주어지면서 다른 사람은 그것에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순전히(plainly pleinli) 하나님의 단순한 즐거움(pleasure plr) 때문이라면(owing to) 크고 난감한 의문들이 즉시(immediately imːditli) 일어나게(arise riz)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한 견해(view vjuː)들이 선택과 예정에 관해 받아들이지(entertain ntrtin) 못할 때 그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inexplicable inksplikbl) 의문(question kwstn)들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당혹스러운(perplexing prplksiŋ) 주제(subject sbdikt)로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예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을 예정했다는 것은 거대 집단(great body) 인류(mankind mænkind)의 생각과 대부분(most moust) 일치가 안 되는(incongruous inkŋgrus) 말이라고 간주할(deem diːm)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But before I enter on the subject, I have some remarks to address to two classes of men. 그러나 본 주제에 들어가기(enter ntr) 전에 나는 두 부류(class klæs) 사람들에 대한 어떤 소견(remark rimːrk)을 말하고자 합니다.

The subject of predestination, which in itself is attended with considerable difficulty is rendered very perplexed and hence perilous by human curiosity, which cannot be restrained from wandering into forbidden paths and climbing to the clouds determined if it can that none of the secret things of God shall remain unexplored.
그 자체로 상당한(considerable knsdrbl) 어려움(difficulty dfiklti)이 수반되는(attend tnd) 예정의 주제는 아주 난감하게(perplex prplks) 만들고(render rndr) 그리고 금지된(forbidden frbdn) 길(path pæθ)들에 들어가고 구름 위로 올라가 헤매는 것을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의 호기심(curiosity kjristi)이 생길 위험이(perilous prls)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if it can) 하나님의 비밀(secret sːkrit)에 속하는 것(thing θiŋ)들은 아무도 탐구하지 못하게(unexplored niksplːrd) 그대로 두자는(remain rimin) 결심을 했습니다(determine ditːrmin).

When we see many, some of them in other respects not bad men, every where rushing into this audacity and wickedness, it is necessary to remind them of the course of duty in this matter.
어디든 이러한 무모함(audacity ːdsti)과 사악함으로 돌진하는(rush r) 많은 사람을 우리가 볼 때 그들 가운데 다른 점(respect rispkt)들에서 나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이 문제(matter mtr)에 있어서는 (지켜야 할) 의무(duty djːti)의 행로(course kːrs)를 그들에게 상기시켜 줄 필요(necessary nssri)가 있습니다.

First, then, when they inquire into predestination, let then remember that they are penetrating into the recesses of the divine wisdom, where he who rushes forward securely and confidently, instead of satisfying his curiosity will enter in inextricable labyrinth.
그러면 먼저 그들이 예정(predestination pridstnin)에 대해 문의할(inquire inkwir) 때 그들이 신성한 지혜의 깊숙한 곳(recess rːses)으로 침투하고 있다는(penetrate pntrit) 것을 상기시켜(remember rimmbr) 주세요. 그가 안심하고 자신 있게 앞으로 돌진하는 곳은 그의 호기심(curiosity kjristi)을 만족시키기는커녕(instead of satisfying) 헤어날 수 없는(inextricable inkstrikbl) 미로(labyrinth lbrnθ)에 들어갈(enter ntr)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For it is not right that man should with impunity pry into things which the Lord has been pleased to conceal within himself, and scan that sublime eternal wisdom which it is his pleasure that we should not apprehend but adore, that therein also his perfections may appear. Those secrets of his will, which he has seen it meet to manifest, are revealed in his word--revealed in so far as he knew to be conducive to our interest and welfare.
왜냐하면 인간이 주님께서 자신 속에 감추고(conceal knsːl) 싶어하신(please pliːz) 것들에 벌을 받지 않고(impunity impjːnti) 파고들고(pry prai) 그리고 우리가 이해해야(apprehend æprihnd) 하는 것이 아니라 경모해야(adore dːr)하는 숭고하신(sublime sblim) 영원한 지혜를 자세히 조사하겠다고(scan skæn)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도(therein ðεrn) 주의 완전하심(perfection prfkn)이 나타날(appear pr) 수 있는 데 말입니다. 주께서 나타내기(manifest mnfst) 위해 보여주고 계시는 그의 뜻이 담긴 이 비밀들은 그가 아시는 한에 있어서(in so far as) 우리의 이익(interest ntrist)과 복지(welfare wlfr)에 이바지하기(conducive kndjːsiv) 위해 계시된(reveal rivːl) - 그의 말씀 속에 계시된 것들입니다.
멜란히톤 유아세례.JPG
 
칼빈은 예정과 유기에 대한 논증을 이론적으로 알기 위해 성경의 경계를 벗어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정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기(遺棄)라고 하는데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유기(reprobation reprbin)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유기 교리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또한 바울 사도도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17-23
 
우리가 유기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믿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선택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인 반면 유기의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유기의 원인은 죄인들에게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 교리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이 영원 전에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베풀어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을까요. 그것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유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이 은혜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행위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요리문답 1조는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5-2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같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습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습관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 이유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즉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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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 어떤 사람은 구원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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