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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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색이 섞인 부드러운 느낌의 분홍색 입술을 가졌을 안나 카레니나가 젊은 귀족 장교 브론스키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절망합니다. 그녀가 실연(失戀)에 마음을 잃고 몸을 던진 기차는 한 번 출발하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동물(動物)입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세상에서 소망을 잃었지만 주님 은혜로 믿음을 가진 교인들이 모인 교회도 믿음과 소망이 뒤엉키는장소이자 신자들을 싣고 한 번 출발하면 하나님 나라 종착역 까지 달려갈 수밖에 없는 구원열차(救援列車)입니다. S. 프로이트의 기본원리에서 출발하면서도 생물학적 충동보다는 환경과 사회적 상황이 개인 성격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여성심리학자 카렌 호니(Karen Horney 1885~195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듯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신자는 스스로의 성화(聖化)를 완성하기 위해 믿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거듭 태어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합니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신자다움’과 ‘내 믿음의 나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은 영어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성경대로 살고 싶은 교인이라면 그리고 그 삶을 전하고 싶은 전도자라면 개혁신학의 모태 『기독교강요』를 읽고 개혁주의 사상을 익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 현대 신앙인이라면 알아두면 좋을 진리를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을 통해 인생을 공부하고 싶게 만들고 스스로 배운다는 것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들기 위한 책입니다. 영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배운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8편 4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이렇게 생령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동물의 본성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동시에 성자의 영혼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동료 인간을 죽이기 위하여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면서 그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머리를 똑바로 들고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에덴을 나온 이래 사람은 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적이란 이루거나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나 방향입니다. 사람의 목적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간명하게 일깨워주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이 진리를 깨우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원히 사는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7-11

바로 이러한 바울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을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한다거나 즐기는 것은 무엇을 좋아하여 거기에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마음을 쏟게 됩니다. 이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쾌락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 쾌락은 근본적으로 삶의 성취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쾌락이란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충족되고 얻게 되는 부차적 효과입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 삶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쾌락을 얻는 것을 자기의 목표로 삼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쾌락은 목표의 대상이 아니라 목표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같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습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즉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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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의 칼빈(John Calvin 1509년~1564)은 죽기 5년 전 1559년 8월 1일 자신의 라틴어판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위해 쓴 ‘저자의 개정 마지막 판에 덧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I may further observe, that my object in this work has been, so to prepare and train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 for the study of the sacred volume, that they may both have an easy introduction to it, and be able to prosecute it with unfaltering step;

이 저술에 있어서 나의 목적은 신성한 두루마리(the sacred volume 성경) 공부를 위하여 성직후보자들(聖職候補者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so to prepare and train) 계속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성경)의 쉬운 개론(槪論)에 접할 수 있고 단호하게(with unfaltering step) 그것을 적용할(prosecute)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말처럼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면 성경의 지식과 적용의 힘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삶과 성직자로서의 능력을 배가시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의 저서가 모태인 칼빈주의 교회의 특성과 유익은 한 가정의 모계 가족과 부계 가족의 종교 내력을 따지지 않는 식구 간의 유대(紐帶)와 결합에 있습니다. 칼빈은 신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순종을 가르치고, “우리는 풍부하든 풍부하지 않든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신자들이 서로 협력하며 살게 했습니다.

총신대 시절 꿈에 그리던 『기독교강요』 원서 강독시간이 되었습니다. 두 권으로 된 『기독교강요』 두툼한 영어 원서를 당시 형편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한 학기 내내 담당 교수는 미국 유명 대학교에서 박사까지 되신 분인데 무슨 이유인지 두 페이지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수이신데 학교 밖의 일로 늘 바쁘셨고 정작 시간이 되면 영어 원문 해석이 와 닿지를 않고 다른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 시간 기억이라고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혼자서 『기독교강요』 영역본 두 권을 붙들고 읽고 또 읽어 1년 반 만에 독파했습니다. 그 뒤 어지간한 영어 원서는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는 다시 보지 않아 독파할 때도 미흡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내용은 다 흘러가버린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핵심을 간추려 영한(英韓) 역본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종류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수업은 주고 받는 授를 써서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 주는 수업(授業)이 있습니다. 둘째 수업(修業)은 닦을 修를 써서 작가 수업처럼 혼자서 교재 등을 이용해 기술이나 학업을 스스로 익히고 닦는 수업입니다.
 
본서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은 둘째 수업(修業) 방식을 위한 책입니다. 즉 혼자서 『기독교강요』의 영어역(영어역본은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의 원본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번역한 것)과 한글역을 대조해 가며 우리를 성경의 삶으로 이끄는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깨우치는 한편 영어 원서를 읽고 영어 구조를 익히기 위해 『기독교강요 영어수업(修業)』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내 후배 목사나 후보생들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영어 번역에 있어서 가능한 문장의 순서에 따른 직역을 하고 교리적인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덧붙여 본서의 전반부 11과까지는 영어 원문 읽기의 편이성과 습관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단어마다 발음을 달았습니다. 영어의 기본 중의 기본이 발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강요(綱要)로 번역된 단어 institute[nsttjːt (단기의) 강습회, 규칙, 관습, 원리가 어미에 s가 붙어 institutes 복수가 되면 (법률의) 적요(摘要), 원리의 강요(綱要)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강요』는 기독교에 대한 강령(綱領) 즉 기독교의 으뜸이 되는 진리의 큰 줄거리를 서술한 책입니다. 먼저 칼빈은 제1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Of 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제1장 ‘서로 연결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 and ourselves mutually connected)’ - 그 연결의 본질(nature of the connection)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성호 관계’를 다룹니다. 이제 칼빈이 개혁주의 체계를 세운 『기독교강요』 라틴어판을 영어로 번역한 역본의 일부분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과 영어의 맛을 보도록 합시다. 이 영역본은 가장 최근의 『기독교강요』 1960년 영역판(Philadelphia, Penna. 1960,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wo Volumes.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강요』 라틴어 원본을 베틀즈(Ford Lewis Battles)가 번역하고 맥닐(John T. McNeill)이 편집하고 웨스트민스터 출판부가 출판한 것입니다. 학자들이 이 영역본을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전진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전진할 것을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전진했습니다. 다시 유럽으로 아시아로 전 세계 교회로 전진했습니다.

20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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