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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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필립 노이스
출연 : 에블린 샘피, 데이빗 걸필리, 케네스 브래너

제목 : 피의 레퀴엠, 엄마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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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지리상의 발견’으로 지칭되는 역사는, 기실 살육의 카니발이었고, 인간 존엄의 공동묘지였다. 정의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기만의 비망록이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필두로 시작된 이민 행렬은 3,000만 명에 달하던 북미 대륙 인디언을 몰살시켰다. 지금은 불과 200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뿐이다. 스페인의 코르테즈 군대는 아즈텍 문명을 멸절시켰다. 괌에서는 백인 점령군이 원주민 남자를 모조리 참살함으로써 모계로 이어지는 제3의 혼혈 민족을 낳았다.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노예로 쓰기 위한 인간 사냥이 창궐했으며, 노예의 후손들은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하고 카리브해의 열도에 새로 둥지를 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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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무참한 역사의 그늘 한 귀퉁이에서 미처 조명되지 못한 피의 레퀴엠은 또 무릇 기하이던가. 여기 또 한 조각의 피 묻은 퍼즐이 있다. 20세기 초 호주 대륙의 서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100여 년 동안 백인의 침입에 대항해온 원주민은 중과부적, 백인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원주민특별법에 따라 생활이 일일이 통제되었다. 필립 노이스 감독은 그 압제의 역사 중에서 특히 원주민보호기구의 잔혹상을 미시의 앵글로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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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보호기구는 혼혈아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혹은 사랑의 열매로, 혹은 강간의 결과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을, 원주민보호기구는 언제든 어디서든 강제로 데려다가 수용시설에 유치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생이별도 그런 생이별이 없었다. 명분은 거창했다. 백인의 피가 절반은 흐르는 아이들을 어떻게 원주민의 야만적인 생활 속에 버려둘 수 있겠는가, 데려다가 교육을 받게 하고 문명을 누리게 하고 신의 품에 안기게 하자. 아이들은 원주민 어머니에게서 강제 격리되어 백인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기도를 배웠고, 일을 배웠다. 그리고 백인 가정에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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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학습된 하인으로서, 하녀로서, 혹은 3D 직종의 막노동꾼으로 공급되는 거였다. 원주민 언어가 금지되었고, 원주민 풍습이 금지되었고, 고향 생각이 금지되었다. 좀더 백인에 가까운 2세, 3세를 낳도록 하기 위해 결혼을 강제하기도 했다. 밤이면 성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강제 이주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강제 이주의 후유증으로, 정체성의 혼란, 문화의 단절, 가정 파괴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도둑맞은 세대(The Stolen Generations)'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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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노이스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틴 올슨에게서 각본을 받고 전율했다. 도리스 필킹턴이 쓴 실화소설 <토끼 방지 울타리를 따라서>(Follow the Rabbit-Proof Fence)>를 각색한 시나리오였는데, 주인공이 바로 도리스 필킹턴의 친모인 ‘몰리 크레이그’였다. 영화는 14살 몰리(에블린 샘피 扮)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어, 실제 인물 몰리 크레이그(84세)의 진솔한 표정을 화면에 가득 채우면서 막을 내린다. 필립 감독은 가능한 한 기교를 자제하고, 원작에 담긴 고통과 감동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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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호주 서부의 지갈롱.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이 어린 몰리와 8살바기 동생 데이지, 10살짜리 사촌 그레이스, 세 계집아이를 순찰차에 태우고 어미들의 울부짖음을 남겨둔 채 떠난다.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무려 1,500마일(약 2,400km) 떨어진 낯선 곳. 강압과 규율에서 소름끼치는 미래를 예감한 몰리는, 어느날 두 동생을 데리고 수용소를 탈출한다. 잡히면 감당하기 어려운 혹독한 체벌이 기다리고 있다. ‘개코’라는 별명을 가진, 같은 원주민 출신의 무두(데이빗 걸필리)가 이들을 추적한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베테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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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크게 두 갈래의 축으로 미묘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아무런 준비 없이, 허름한 차림에 신발조차 변변치 못한 아이들의 머나먼 여정. 배를 주리고 숨을 죽이며 가야 하는 가시밭 길이다. 현상금이 붙고, 곳곳에서 현상금을 노린 이들의 거짓 친절이 거미줄처럼 기다리고 있다. 유일한 희망은 한없이 뻗어 있는 ‘토끼 방지 울타리’(이 울타리는 토끼로부터 농경지를 지키려는 경계이자, 백인과 백인 아닌 ‘것’들을 나누는 상징이다). 그 울타리를 따라가다 보면 고향이 나온다. 뒤에서는 개코 무두가 말을 타고, 반대쪽에서는 경찰이 지프를 몰고 울타리를 훑어온다. 울타리가 희망이자 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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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쫓고 쫓기는 얼개를 두고, 감독은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콧날 시큰한 숨바꼭질 놀이를 펼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실 하나로, 몰리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엄마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저 눈물의 포옹도 잠깐, 피도 눈물도 없는 백인의 공권력은 이미 고향 지갈롱을 지배하고 있다. 저토록 짓밟힌 삶에게 승리란, 그저 살아남는 것. 그저 무너지지 않고 견디는 것. 저 ‘백 년 동안의 고통’은 보상되지 않는다. 인간을 착취하는 인간의 무한 욕정 앞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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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리멸렬한 삶에도 웃음은 있다. 어린 몰리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순간, 화면이 밝아지면서 8순의 두 노인이 파안의 웃음을 흩날린다. 몰리와 데이지, 햇살에 트고 세파에 무르익은 주름 투성이의 웃음이다. 살아남은 자의 웃음이다. 이렇게 느꺼운 생존도 있었다. 이렇게 갸냘픈 승리도 있었다. 몰리와 데이지는 웃지만, 그 웃음 앞에서 관객의 가슴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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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한 것은, 필립 노이스 감독의 필모그라피다. 17세에 영화계에 입문한 호주 출신의 필립 감독의 대표작은 <패트리어트 게임>(1992년)과 <긴급명령>(1994) <본 콜렉터>(1999). 전형적인 할리우드 풍으로 팩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던 감독이 어느날 수구초심, 호주 영화로 돌아가는데, 하필 반정부 색상이 농후한 전복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관객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필립 감독의 뇌리에 불현듯이 영화 <쿼바디스>의 감독 머빈 르로이가 첫 시사회를 마친 뒤 외쳤다는 유행어가 떠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신이여! 정녕 이 작품을 제 손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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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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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 시네마힐링 - 토끼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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