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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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주아>

감독 : 자카리아스 쿠눅
출연 : 나타르 웅갈락, 실비아 이발루
제목 : 에스키모, 그들의 선택은 아름다웠다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아파트 옥상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리는 철부지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잔인함을 읽는다. 아이들의 해맑은 눈동자는 일종의 보호색 정도라고 애써 폄하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 생명들은 거개가 ‘귀여움’을 보호색으로 차용하기 마련이다. 본디 선한 사람도 있다. 대책없이 착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좋아하지만, ‘자비’라는 열성인자를 물려받은 멸종 위기의 안타까운 희귀종이라고 애써 치부한다.
 
그렇다고 성악설을 맹신하는 것도 아니지만, 은연중에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분법 사이에 끼여 있었다. 두 대립항은 맹렬한 논리로 생명의 본성을 갈파하며 인간을 정의하고 또 강요한다. 그랬다. 적어도 영화 <아타나주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쩌면 중요한 것은, 성선인가 성악인가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는 것 아니었을까. 아타나주아의 태도는 애절하다. 인간의 가슴에 도사린 일말의 따뜻함을 희구하는 아타나주아의 세계관은 애절하다 못해 곤고하다. 그 간절함의 끝에 맺힌 주술의 몸짓은 더 이상 미신이 아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아름다울 것이다. 아니, 아름다워야 한다. 이 우둔한 맹목은 과학보다 간명하고 합리보다 미래지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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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타나주아>는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설원, 일망무애의 빙토를 살아낸 에스키모의 구전 신화를 스크린에 옮긴 대서사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북극의 하늘 아래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고 죽이는 저들의 삶은 놀랄 만큼 우리와 닮아 있고, 또 놀랄 만큼 다르다. 영화 <아타나주아>는 그 다름에 관한 파노라마다. 
 
먼 옛날, 혹은 가까운 옛날이어도 좋다. 한 무리의 에스키모가 부족장을 정하는 날 ‘사우리’는 맞수인 ‘툴리막’을 누르고 새로운 리더로 추대되는데 분위기가 무언가 석연치 않다. 세월이 흘러 사우리의 아들 ‘오키’와 딸 ‘푸야’ 그리고 툴리막의 두 아들 ‘아막주아’(힘센 사나이)와 ‘아타나주아’(빠른 사나이)가 이야기 전면에 등장한다.
 
사우리 가문은 이를테면 ‘카인의 후예’다. 악역이다. 지배욕과 호승심이 강하고, 질투에 사로잡혀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이다. 툴리막 가문은 물론 ‘아벨의 후예’다. 사우리 집안이 좋은 고기와 가죽옷으로 풍요를 누리는 동안, 주리고 헐벗은 생활고를 딛고 아막주아와 아타나주아(나타르 웅갈락)는 뛰어난 사냥꾼으로 성장한다.
 
특히 쾌활하고 친절한 ‘얼짱’ 아타나주아는 처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문제는 오키의 약혼녀인 ‘아투아’(실비아 이발루)가 아타나주아에게 마음을 주면서부터다. 질투에 눈이 먼 오키가 먼저 결투를 신청하고, 언감생심이던 아타나주아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분을 삭히지 못한 오키는 ‘죽여버리겠노라’고 공언하며 이를 갈고 다닌다.
 
다음번 악역의 주인공은 ‘푸야’다. 에스키모들은 아내가 임신을 해서 몸이 무거워지면 살림을 대신 꾸려줄 두 번째 부인을 맞는다. 남자는 사냥을, 여자는 살림을 맡아야 하는 혹독한 환경이 빚은 풍습이다. 하필 새 부인이 푸야다. 손도 까딱 않고 아투아를 부려먹던 푸야는 급기야 옆자리-에스키모는 온가족이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에서 잠자던 아막주아를 유혹했다가 발각되어 쫓겨난다.
 
눈물로 호소하는 푸야의 거짓말에 눈이 뒤집힌 사우리는 오키에게 살인을 명하고, 묵은 감정까지 곱절로 폭발한 오키는 사냥에 지쳐 잠자는 형제의 천막을 덮친다. 짓뭉개진 아막주아의 주검을 뒤로하고 알몸으로 설원을 내달리는 아타나주아. 칸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던 바로 그 명장면이다.
 
아타나주아는 얼음바다 어느 구석에서 은인을 만나 생명을 구하고 권토중래를 도모한다. 풍비박산난 아타나주아의 가족은 사우리의 무릎 아래서 목숨을 구걸하고, 오키는 강제로 아투아의 몸을 탐한다. 익숙한 내러티브, 영락없는 홍콩 무협영화의 플롯이다.
 
영화 <아타나주아>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홍콩 무협의 스토리가 ‘거시기’한 까닭은, 관객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머리 복잡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껏 무림 고수들의 몸의 향연을 즐기게끔 하자는 배려 때문이다. <아타나주아>는 홍콩 무협의 활극 대신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에스키모의 삶의 진실을 흠뻑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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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주아>는 에스키모어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다. 감독과 출연진 전원, 그리고 스탭의 90% 이상이 에스키모다. 자카리아스 쿠눅 감독과 제작자 겸 주연을 맡은 나타르 웅갈락은 한편으로 유명한 에스키모 조각가이기도 하다. 조각품을 판매한 자금이 제작비에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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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영화를 보며 감독의 꿈을 키우던 쿠눅 감독은, 스티로폼으로 지은 이글루에 올림픽 성화 같은 횃불을 꽂아둔 할리우드식 표현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아타나주아’는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바탕에 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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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를 짓는 과정, 개썰매의 모든 것, 아기를 넣을 수 있도록 커다란 모자가 달린 여인들의 의상에 이르기까지 에스키모 버전의 ‘네오리얼리즘’ 미장센이다.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썰어내는, 뼈와 돌로 만든 도구들까지도 일일이 전통 기술로 만들었다. 게다가 북극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스탭 전원이 에스키모식으로 생활하며 촬영했다.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에 빛나는, 소실점까지 하얗게 펼쳐지는 ‘빙평선’의 파노라마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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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복층적으로 뒤섞지 않고 구전 신화에 충실한 연유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인식론적 진면목이 숨어 있다. 아타나주아가 귀환하면서부터 영화는 홍콩 무협과 궤를 달리한다. 신화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아버지마저 살해한 오키 일당을 용서한다.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악령이 들려서라고, 혼내줘야 할 대상은 오키가 아니라 악령이라고, 그러므로 오키를 죽일 수 없다고. 오키를 악령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한바탕 씻김굿이 벌어지고, 마침내 오키와 푸야 일당에게 추방령이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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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과 주술의 개념을 빌린 미신적 인식론이 성선설·성악설보다 훈훈하게 다가온다. 오키 추방령은 곧, 인간 본성에 대한 에스키모 후예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신화를 구전해온 에스키모들이 선한 삶과 용서를 미덕으로 선택했듯이, 영화를 찍은 후예들 역시 같은 선택을 한다. 에스키모들의 선택은 아름답다. 아벨의 후예들이 유목의 신성함을 강조하느라 카인(농경)의 후예를 악인으로 낙인 찍어버린 구약의 낡은 스토리텔링보다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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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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