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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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습한 템포 내일 다르고
다음 날 다시 바뀌는 지휘자
단원들 그 지휘 신뢰하지 않아
 
연주자들을 때로 설득하고
때로 연습시키고 때로 양보하고
때로 기 싸움을 해가면서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템포로 이끌어가는 것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끌어내는
지휘자 같은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그 다음 총회와 총신을 지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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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낡은 성경이 한 권 있다. 검정 가죽표지가 하도 낡아 오래 전부터 그 성경을 바라보기만 한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하나님 말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위로로 배열해 주던 그 성경에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성경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놀란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성경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믿음을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성경이 한 권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믿음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의심투성이의 누런 믿음은 구름이다. 어떤 의심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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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믿음’이라고 하겠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다. 믿음이 아팠다. 믿음으로 산 사람 믿음이란 말 총회로 가져가라. 그러면 다른 오는 총대 믿음이란 말 들고 총회로 와야겠네. 한 총회가 가고 또 한 총회가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믿음일 걸. 오랜 묵은 믿음으로 호흡하고 맥박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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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통증과 성장은 믿음의 출산과 양육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믿음에는 목숨이 들어 있고 앓는 마음이 산다. 믿음을 가져갈 수 없어 돈을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마지막 길을 가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호흡을 만드는 폐와 맥박을 뛰게 하는 심장을 우리는 다 가슴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목사 된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폐와 맥박을 뛰게 하는 심장을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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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사회자가 “신부 입장”하고 외치면 그 날의 여주인공이 웨딩드레스를 끌면서 등장한다. 흔히 그의 아버지와 손을 잡고 ‘매우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때 가장 많이 쓰이는 음악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의 합창’(흔히 웨딩마치라고 부른다)이다. 이 아름다운 곡의 빠르기 지시는 실은 ‘보통 속도로’이다. 실제로 연주회에서나 오페라 공연에서 이 곡의 빠르기는 결혼식에서보다 훨씬 빠르다.
 
그런데 신부가 ‘매우 천천히’ 들어온다고 느낀 나의 느낌은 어디서 근거한 것일까. 아마 그것은 사람들이 걷는 보통 속도를 기준으로 비교한 것일 터이다. 보통 속도라고 얘기하지만 이 역시 주관적이긴 하다. 나는 1분에 80~90보를 걷는 속도면 보통이라고 느낀다. 음악에서 모데라토(보통 속도로) 역시 이 정도의 빠르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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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들이 음악에 빠르기를 지시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크 시대였다. 그 이전에는 춤음악 외에는 빠르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따로 지시가 없어도 관습적으로 그 빠르기를 알 수 있었고 춤음악 경우에도 춤의 이름만 밝혀 놓으면 그 빠르기가 정해졌다. 기악이 발달하고 음악의 표현이 다양해지면서 빠르기를 분명하게 정할 필요가 생겨 ‘빠르게’, ‘보통 속도로’, ‘느리게’ 등의 지시가 악보에 적히기 시작했다.
 
템포의 지시를 써넣게 되자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빠르게’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는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크 시대 이후에 음악은 훨씬 다감하고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게 되어 빠르기의 지시도 더 세분될 필요가 생겼다. 베토벤 시대에 메트로놈이라는 템포기계가 고안되어 1분에 들어가는 비트, 즉 박(拍)을 숫자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M.M.♩=60은 1분에 4분음표 60개가 들어가는 속도이다. 그렇다면 한 비트가 1초니까 보통의 걸음걸이보다는 느리다. 아마 조금 빠르게 입장하는 신부에게 맞는 템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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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악보 소프트웨어가 있어서 작곡한 곡을 입력해 놓으면 컴퓨터가 음악을 연주해 들려준다. 빠르기도 지정할 수 있어서 들어보면서 템포를 정한다.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실제로 연주할 때면 템포가 작곡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작곡자의 템포감은 주관적이다 못해 밤에 다르고 낮에 다르다.
 
작곡자는 이렇듯 변해도 지휘자는 그럴 수 없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템포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지휘자의 동작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비트와 박자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멋을 부리고 개성을 나타내는 것은 그 다음이다. 흥분해서 빨라져도 안 되고 단원들에게 휘둘려도 안 된다. 지휘자가 반드시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지만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템포감은 꼭 필요하다. 오늘 연습한 템포와 내일 연습한 템포가 다르고 다음 날 다시 템포가 바뀌는 지휘자를 단원들은 귀신같이 안다. 그리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더 이상 그의 지휘를 신뢰하지 않는다.
 
지휘자가 등장한 이래 약 200년 동안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그 규모와 내용이 매우 크고 복잡해져서 지휘자의 존재가 없으면 연주는커녕 연습을 시작하기도 어렵다. 저마다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들은 나름대로 템포와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또 단원 중에는 지휘자가 제시하는 템포와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또 하나의 복잡한 세상이다. 이런 연주자들을 때로 설득하고 때로 연습시키고 때로 양보하고 때로 기 싸움을 해가면서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지휘자가 끌어내듯 교인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목사의 일이다. 그런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이끌고 그 다음 103회를 맞는 총회와 총신을 지휘해야 할 것이다.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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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회 맞는 총회와 총신의 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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