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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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 

장르 : 애니메이션
기획 : 제프리 카젠버그
제작 : 드림웍스 

동화보다 아름다운 ‘엽기 판타지’

동화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옛날 옛적에~’ ‘무카시 무카시~’ ‘원스 어폰 어 타임~’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동서고금,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닮은꼴이다. 파스텔 톤의 그림동화책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첫 장을 넘기면서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슈렉>의 첫 장면도 ‘원스 어폰 어 타임~’이다. 그러나 흔히 동화, 또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선입견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갑자기 솥뚜껑 같은 손이 동화책을 덮고는 책장을 홱 찢어낸다. 그리고 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동화책은 괴물 슈렉의 ‘대변지’였다. 볼일을 마친 슈렉이 화장실 문을 쾅 닫고 나온 뒤 1분 여 동안 영화는 자기 색깔을 분명히 밝힌다.  

<슈렉>은 일종의 ‘안티 동화’다. 전통적 미학의 틀도 거부한다. 슈렉이 목욕하고 식사하는 사이사이 타이틀 자막이 올라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객석은 웃음바다다. 물 속 방귀에 붕어가 죽어서 뜨고, 진흙 목욕에 달팽이 스테이크까지, 괴물 슈렉의 라이프 스타일과 캐릭터가 소개되는 사이 <슈렉>은 자연스럽게 향후 1시간 여 동안 이 애니메이션이 견지할 자세와 입장을 예고한다. 

어느 날 깊은 숲 속 늪지에서 혼자만의 고즈넉한 고독을 즐기는 슈렉(마이크 마이어스)에게 기겁할 일이 발생한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신데렐라, 꼬마 돼지 삼형제, 피노키오, 피터팬 등 성장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동화의 온갖 주인공들이 슈렉의 늪지로 몰려와 진을 친 것이다. 자기 연민 콤플렉스를 가진 포악한 영주 파콰드(존 리트고)가 동화 속 주인공들을 자신의 영지 밖으로 쫓아낸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늪지를 예전처럼 되돌리기 위해 파콰드를 찾아간 슈렉은, 대신 불을 뿜는 용의 성에서 피오나 공주(카메론 디아즈)를 구해오기로 약속한다. 백마 대역으로 따라붙은 말 많은 당나귀(에디 머피)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공주를 구한 슈렉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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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공주 구출 이야기’를 기본 얼개로 삼고 있지만, <슈렉>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화의 문법을 전복해가며 노골적인 패러디로 ‘왜 공주는 반드시 미녀여야 하는지, 공주를 구하는 건 꼭 백마를 탄 왕자나 기사여야 하는지, 기사는 잠든 초면의 공주에게 함부로 키스해도 되는지, 공주는 왜 그렇게 첫 키스를 받고 싶어 안달을 하는지’ 딴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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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의 첫 번째 포인트는 종전의 동화들이 세뇌하듯 건설해온 통념을 뒤집는 ‘엽기 전략’이다. 괴력을 가진 슈렉의 주무기는 트림과 입 냄새. 얌전해 보이는 피오나 공주는 <와호장룡>의 소녀 검객과 <매트릭스>의 여전사를 합쳐놓은 듯한 왈가닥이다. 아리아처럼 고운 피오나의 노래 소리는 죽음을 부르고, 피오나는 새알을 가져다 태연히 프라이 요리를 한다. 슈렉과 피오나는 풍선 배틀로 관객의 턱을 빠지게 하고는 사이좋게 ‘들쥐 바비큐’를 뜯는다. 불 뿜는 용은 당나귀에게 첫 눈에 반해 사랑의 열병을 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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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매력은, 현대 사회와 풍습에 대한 고도의 풍자다. 파콰드 성의 액션 신에서는 레슬링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세태를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원형극장 결투 신으로 패러디하여 일침을 가하고, 로빈훗 일당과의 대결 장면에서는 뮤지컬을 마음껏 비틀어 웃음으로 바꿔버린다. 방송사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듯 ‘정숙’ ‘웃음’ ‘박수’ ‘함성’ 따위 피킷을 쳐드는 대목도 재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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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객석을 요절복통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슈렉>의 비틀기는 결코 우연의 소치가 아니다. 84년 디즈니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과 인연을 맺은 제프리 카젠버그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영락해가던 디즈니 왕국의 르네상스를 견인한 인물이다. ‘가족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란 콘셉트 아래 어린이용 캐릭터 사업을 디즈니의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자리매긴 그가 디즈니를 떠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손잡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새 장을 열게 된 이면에는 나름의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10대들 대부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극장에 가지 않는다. 열 살 이하의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인 30대 이상이 디즈니의 주 관객이다. 나는 <슈렉>을 보러 온 관객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멋진 액션과 불을 뿜는 용, 슬랩스틱 유머나 개그에 즐거워한다. 10대와 20대의 반응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이 자라온 세상에 대한 ‘불경스러운 패러디’에 열광했다. 인습을 뒤집는 ‘쿨’한 문화적 코드가 10대와 20대를 사로잡는 매력이 되리라는 게 나의 확신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카젠버그는 이렇게 밝혔다. <개미> <이집트 왕자> <엘도라도> <치킨 런>으로 이어지는 드림웍스의 일관된 작품 경향이 카젠버그의 확신의 반영이었음은 물론이다. 

<슈렉>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실사에 가까운 3D 애니메이션의 테크닉이다.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실감나는 움직임, 피오나의 머릿결과 옷자락의 느낌, 당나귀의 털, 발 밑에 밟히는 풀들의 움직임, 나뭇잎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숲의 이미지, 물·우유·맥주 등 액체의 표현, 용이 내뿜는 불과 들끓는 용암의 열기 등 <슈렉>이 보여주는 영상은 애니메이션 기법의 신기원으로 평가된다. 피오나의 표정은 너무 실사와 흡사해서, 일부러 표현 수위를 낮추기까지 했을 정도다.  

<개미> 제작으로 극찬을 받았던 드림웍스의 파트너 PDI는 <슈렉>을 위해 ‘쉐이퍼’(몸의 근육 및 표정 변화를 표현하는 프로그램)와 ‘쉐이더’(피부와 옷감 등에 굴절·반사되는 다양한 빛을 표현하는 프로그램)라는 소프트웨어를 새로 개발했고, 수십억 개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도록 ‘디지털 그린 하우스’와 ‘디지털 인형 하우스’를 만들었다. 사람의 표정을 창조하는 ‘안면 근육 애니메이션 시스템’과 액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액체 애니메이션 시스템’을 한 차원 끌어올렸으며, 때로는 스탭이 직접 진흙 세례를 받는 실험까지 치렀다고 한다. 

이같은 성가에 힘입어 <슈렉>은 제54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정식 초청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이 칸의 경쟁부문에 초대를 받은 것은 1973년 특별상을 수상한 르네 랄루의 <판타스틱 플래닛> 이후 28년 만의 일이다. 제프리 카젠버그는 이에 대해 “아카데미에서 <글래디에이터> <아메리칸 뷰티>가 상을 받은 것보다 훨씬 기쁘다”고 말했다. <슈렉>은 미국에서만 개봉 11일 만에 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box : 디즈니 왕국과 새로운 도전자들 

제프리 카젠버그와 디즈니의 인연은 미묘한 구석이 있다. 카젠버그의 입성과 함께 <인어공주>의 흥행으로 디즈니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고, <라이온 킹> 성공 이후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과의 불화로 카젠버그가 떠나면서 디즈니의 상승세가 수그러들었다. 전 세계적인 캐릭터 사업과 일본·유럽으로 확산되는 디즈니랜드의 호황으로 디즈니 왕국은 여전히 굳건하지만,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만 놓고 본다면 도전자들의 등쌀이 그리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먼저 20세기 폭스사가 <아나스타샤> <타이탄 A.E.>로 도전장을 냈고, 워너 브러더스사도 <매직 스워드> <아이언 자이언트>로 도전 대열에 합류했다. 노련한 디즈니의 방어력은 도전자들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생아 드림웍스가 도전장을 이어받았다. 드림웍스의 <개미>와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의 1차전은,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6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디즈니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드림웍스의 패배도 아니었다. <개미>는 미국에서만 9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제작비는 6천만 달러). 

카젠버그는 드림웍스를 설립할 때부터 “동화는 만들지 않겠다. 동화를 스토리텔링의 기초로 삼는 디즈니 전통과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비전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 <개미> <이집트 왕자> <치킨 런> <슈렉>으로 이어지는 드림웍스 행진의 출발이었다. 사업 컨셉트도 디즈니와 달랐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캐릭터·테마 파크 대신, 10대와 성인층을 대상으로 OST와 출판 쪽으로 전략을 다각화한다는 복안도 갖고 있었다. 

디즈니식 동화와 애니메이션은 이미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날카로운 지적을 받고 있었다. 아동 문화 비평가 조셉 H. 스와츠는 디즈니식 세계관의 문제를 이렇게 비판한다. 첫째는 전형성과 상투성이다. 매우 비슷한 줄거리와 상황, 도식적 갈등과 상투적인 대응, 뻔한 결말. 인위적으로 밝은 세상에 인형 같은 주인공들. 틀에 박힌 비현실적 순수함. “이는 마치 ‘걱정마라. 현실에 해결 못하는 어려움은 없다’라는 세뇌 작용에 다름 아니다”라고 조셉은 지적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분법이다. 주인공은 늘 아름답고 착하며 순수하게 그려진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이상화된 비현실적 유년기를 유포시킨다. 반대쪽 등장인물은 징그럽고 폭력적이거나, 자주 실수를 저지르며 못생겼다. 항상 서로를 배신하고 속인다. 이같은 이분법은 세상을 늘 착한 세력과 나쁜 세력으로 이분화하도록 학습시킨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치부하기에는 디즈니의 영향이 세계적으로 너무나 크다는 것이 문제다.” 

바로 이 점에서 드림웍스는 디즈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슈렉>의 주인공들은 이미 충분히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왕따 괴물’ 슈렉과 버림받은 당나귀, 밤이면 정체가 변하는 공주. 이들이 빚어가는 이인삼각의 위로와 사랑. 어쩌면 디즈니가 드림웍스를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흥행 성적이 아니라 바로 이 점, ‘슈렉식 세계관’인지도 모른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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