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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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 <25시>
글 제목 : 행복,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머무는 꿈

감독 : 스파이크 리  
출연 : 에드워드 노튼, 로자리오 도슨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가치’라는 것, 혹은 ‘진실’이라는 것. 결국은 ‘입장’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무사에게는 칼이 길이고, 어부에게는 배가 길이다. 정치인에게는 세 치 혀로 빚어내는 거짓말이 길이다. 어느 길이든 나름의 해가 뜨고 비가 온다. 그 미망의 동아줄을 부여잡고 믿고 의심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죽이고 피 흘린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25시>는 묘한 영화다. 거창한 사건도, 뜨끔한 음모도 존재하지 않는데 내면의 울림이 여간 시큰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저토록 스산한 거리감이 놓여 있었던가. 우정과 타산이 손바닥처럼 뒤집히고, 사랑과 불신이 백지 한 장 차이다. ‘25시’는 미시와 거시라는 두 관점을 절묘하게 아우르며 관계와 입장 사이의 이율배반을 성찰하고, 나아가 집단의 논리, 국가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은유적으로 갈파한다.  

영화는 주인공 몬티 브로건(에드워드 노튼)의 절박한 하루를 그린다. 마약 밀매상 몬티는 누군가의 밀고로 거실에 숨겨둔 마약과 돈다발이 발각되면서 감옥에 가야 할 처지다. 최소 7년 이상의 중형이다. 곱상한 몬티의 외모는 감옥 안에 횡행하는 동성 강간의 ‘0순위’를 보장할 터이다.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인 채 신변정리를 위해 주어진 금싸라기 같은 24시간. 그 하루 동안 삶의 미묘한 무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5시>의 얼개를 이루는 갈등 구조는 두 축으로 짜여진다. 몬티와 연인 내추럴(로자리오 도슨) 사이에, 그리고 죽마고우인 프랭크와 제이콥 사이에. 

몬티와 내추럴의 갈등은 커뮤니케이션 부재라는 시대상의 상징이다. 밀고자가 바로 내추럴이라는 주위의 언질이 반복되자 몬티의 마음은 자꾸 흔들린다. 제 몸보다 더 몬티를 아껴주던 내추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믿어야 흔들리지 않을까. 아니, 믿는 것이 능사일까. 믿을수록 미련한 것 아닐까. 아니 아니, 믿지 않음으로써 먼저 배반하는 것은 아닐까. 아아,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마저도.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갈등의 또 한 축, 죽마고우들의 관계는 독백 혹은 대화의 형식으로 표면화한다. 같은 아일랜드계의 어릴 적 단짝인 몬티와 프랭크, 제이콥은 미국의 옆모습을 비추는 일종의 아이콘으로 읽힌다. 

프랭크(배리 페퍼)는 월스트리트의 잘나가는 펀드매니저, 도박에 가까운 공격적 베팅은 입신의 경지를 구가하나 지나친 우월감으로 일과 후의 인간관계는 젬병인 모습이 영락없이 지구촌의 ‘왕따’ 미국의 위상을 닮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투기 자본을 상징한다. 

고등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제이콥(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부모 덕에 유복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도발적인 여학생 메리(안나 파킨)에게 은밀한 욕정을 느끼면서도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한편으로 청교도적 결벽성을 내세우면서 북미 인디언 살육사와 베트남전/이라크전이라는 피의 강을 건너온 미국의 이중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상징한다.  

이 상징들을 통해 스파이크 리 감독은 몬티 이야기로 9.11 이후의 미국을 사유한다. ‘그라운드 제로’가 내려다보이는 프랭크의 초고층 호화 아파트에서, 프랭크와 제이콥은 몬티의 행각을 비판한다. 학생시절부터 마약 밀매로 풍족한 생활을 누려온 몬티는 또 하나의 은유다. 몬티의 ‘부적절한 돈’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바의 운영자금인 동시에, 가난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유민 내추럴에게 풍요를 안겨준 ‘신의 선물’이었다. 공작과 음모를 불사하며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석유를 챙겨온 미국 군산복합 세력의 ‘부적절한 열매’가 미국 경제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신의 선물’이었던 것처럼.  

감독은 여기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몰려든 이민을 대하는 미국민의 정서를 또 하나의 상징으로 배치한다. 격정에 휩싸인 몬티가 화장실 거울에 적힌 ‘Fuck You'라는 낙서를 보고 “망할 놈(Fucking)의 러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흑인, 히스패닉, 한국인들!!!”이라며 폭발하는 시퀀스다. 데뷔작 ‘똑바로 살아라’에서부터 스파이크 리 고유의 컬러로 인식된 바로 그 득의의 프레임이다. 세계를 ‘미국’과 ‘미국 아닌 것’으로 나누는 이분법, ‘인종의 용광로’라던 미국에서 인종을 나누고 먼저 온 이민자와 늦게 온 이민자를 나누어 일체의 대상을 타자화하는 미국의 배타성에 대한 풍자다.  

이처럼 복합적인 상징들을 염두에 두고도 감독은 스피디하고 매끄러운 연출 솜씨를 보여준다. 감각적인 영상과 북받쳐 오르는 스코어의 선율은 에드워드 노튼의 신들린 연기와 맞물리며 묵직한 감정의 선경을 이룬다. 연출과 연기가 서로를 지배하지도 침해하지도 않으면서 이만큼의 ‘상승무공’을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점진적으로 고조되어 가던 긴장감은 몬티의 송별파티장에서 급격히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데, 한껏 치솟은 엑스터시를 갈무리하는 감독의 연출 맵시가 또한 백미다. 아버지가 모는 차를 타고 감옥을 향해 떠나면서 피떡이 된 얼굴로 차창을 내다보는 몬티의 눈에 비로소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보인다. 러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한국인들은 더 이상 ‘망할 놈’이 아니었다.  

영화 말미에 감독은 9.11 이후의 미국에 대한 은유적 대안을 제시한다. 몬티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서(탈현실), 새로운 일을 찾고(공생), 사람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고(상호존중), 그리하여 평화로운 어느날 내추럴을 불러(신뢰 회복) 알콩달콩 살며 자손 수북하게 낳고 만수무강하는 상상.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 “절대로 (지금, 여기로) 되돌아오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저 상상의 피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25시’다. 동시에 감독은 피안의 풍경 위로 피범벅 몬티의 얼굴을 오버랩시키면서, 현실의 엄중함 또한 잊지 않는다. 자,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어디에도 있다. 마음이 곧 길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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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1998년 <시사저널> 문화부/기획특집부 기자
1999~2000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 편집장
2001~2009년 편집전문회사 <프리앤아이> 편집주간
2010~2015년 프리랜서 작가/칼럼리스트
2016~현재 더굳뉴스 기자

2003년 중견 영화평론가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 회장 역임
2004년 비상업예술영화 중심 ‘작은영화제’ 개최/ 장소 시네큐브
2006년 영화 에세이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출간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 심사위원 역임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 에세이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2016-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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