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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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 VII
교육의 목적
The purpose of education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 ‘언 에듀케이션’(An Educa -tion)에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옥스퍼드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16살 모범생 제니가 교장에게 묻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교장은 답합니다.
“교육은 의무란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무거운 첼로를 옆에 둔 채 비에 흠뻑 젖은 그에게 멋진 자동차를 탄 신사 데이비드가 다가옵니다. 제니는 “비싼 첼로가 불쌍하니 첼로만 차에 태워주겠다”는 데이비드의 위트에 호감을 느끼고 그의 유려한 말솜씨와 예술적 감각 그리고 물량 공세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지루한 학교 교육보다 재미있는 그 체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는 그런 소녀가 당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교육(敎育)이란 말은 본래 맹자의 '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이교육지)'라는 글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각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가르칠 교(敎)’ 자는 회초리로 아이를 배우게 한다는 뜻이고, ‘기를 육(育)’ 자는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뜻입니다. 좀 섬뜩하죠.

그러나 교육(educate dukit)의 영어 어원은 라틴어 educere인데 뜻은 ‘앞으로 인도합니다’(lead forth)입니다. 교육에 대한 한자보다 라틴어의 뜻이 훨씬 부드럽죠.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교 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17에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o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어쨌든 교육 또는 가르침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입니다. 칼빈은 무지렁이 프랑스인을 훈련에 적합하게 ‘단순한 초등교육의 형식으로 저술한’(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기독교강요』 제1권 제1장 1항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연결의 본질’(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MUTUALLY CONNECTED - NATURE OF THE CONNECTION)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Our wisdom in so far as it ought to be deemed true and solid Wisdom, consists almost entirely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But as these are connected together by many ties, it is not easy to determine which of the two precedes and gives birth to the other.
우리의 지혜(wisdom wzdm)는, 참되고 견고한(solid slid) 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한에서는(in so far as), 거의(almost ːlmoust) 완전히(entirely entirli) 두 요소(part pːrt)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그러나 이것들이(두 요소) 많은 끈(tie tai)들로 함께(together tgðr) 연결되어(connect knkt) 있기 때문에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앞선(precede prisːd) 것이고 다른 것을 생기게(give birth bːrθ) 하는 것이라는 걸 결정하기란(determine ditːrmin) 쉽지(easy ːzi) 않습니다. 왜냐하면(for fːr) 첫째로(in the first place) 아무도(no man)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in whom he lives and moves 참조. 행 17:28)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forthwith fːrθwith) 돌리지(turn tːrn) 않고는(without wiðut) 자기 자신을(himself himslf) 관찰할(survey sːrvi) 수 없기 때문입니다.

For, in the first place, no man can survey himself without forthwith turning his thoughts towards the God in whom he lives and moves; because it is perfectly obvious, that the endowments which we possess cannot possibly be from ourselves; nay, that our very being is nothing else than subsistence in God alone.
왜냐하면 첫째(in the first place) 우리가 소유한(posses pzs) 재능(endowment endumnt)은 우리 자신에게서(from ourselves) 도저히(possibly psbli 부정문에서 can과 같이 사용할 때 ‘아무리 해도’, ‘도저히’ …않다는 뜻 I cnnot possibly do it. 도저히 할 수 없다) 나올 수 없다는 게 아주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니(nay nei 오히려), 바로 우리의 참(very vri) 존재(being bːiŋ)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실제 존재(subsistence sbsstns ‘real being’)일 따름입니다.

In the second place, those blessings which unceasingly distil to us from heaven, are like streams conducting us to the fountain. Here, again, the infinitude of good which resides in God becomes more apparent from our poverty. In particular, the miserable ruin into which the revolt of the first man has plunged us, compels us to turn our eyes upwards; not only that while hungry and famishing we may thence ask what we want, but being aroused by fear may learn humility.
둘째로(in the second place) 하늘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unceasingly nsːsiŋli) 방울져 떨어지는(distil distl) 이러한 축복들은 우리를 원천(fountain funtin)으로 인도하는(conduct kndkt) 개울(stream striːm)들 같습니다. 이 점이 또 하나님에게 있는 한없는(infinitude infntjːd) 선하심이 우리의 부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특히(In particular prtkjlr) 우리를 비참한 파멸로 몰아넣은(plunge plnd) 첫 사람의 반역이 우리의 눈이 위로(upward pwrd) 향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가 배고프고(hungry hŋgri) 굶주릴지라도(famish fmi)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으로 각성이 되어 겸손(humility hjuːmlti)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For as there exists in man something like a world of misery, and ever since we were stript of the divine attire our naked shame discloses an immense series of disgraceful properties every man, being stung by the consciousness of his own unhappiness, in this way necessarily obtains at least some knowledge of God.
왜냐하면 인간 속에 비참한(miserable mzrbl) 세상(world wːrld)과 같은 어떤 것이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신성한 의복(attire tir)이 벗겨진(strip strip) 이후 우리의 벌거벗은(naked nikid) 수치심(shame eim)이 인간 자신의 불행(unhappiness nhpinis)의 자각(consciousness knsnis)으로 찔림을 받는 모든 인간에게 끝없이(immense imns) 이어지는(series sriːz) 수치스러운(disgraceful disgrisfl) 소유 본능(property prprti)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disclose diskluz). 이렇게 해서(in this way)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knowledge nlid)을 아주 조금이라도(at least liːst) 반드시(necessarily nssrli) 얻게 됩니다(obtain btin).

칼빈이 그의 저서 첫머리 첫줄에서 언급한 ‘참되고 견고한 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한에서의 우리의 지혜’라고 말할 때 그 지혜(wisdom wzdm)는 무엇일까요.

웹스터 영영사전은 지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wisdom wzdm ability to discern inner qualities and relationships.’ 즉 지혜는 내적 특성(quality kwlti)들과 관계(relationship rilinp)들을 분별하는(discern disːrn) 능력(ability blti).

성경은 지혜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영영 사전과 성경의 정의대로 지혜가 내적 특성(quality kwlti)들과 관계(relationship rilinp)들을 분별하는(discern disːrn) 능력(ability blti)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1권 제1장 1항 상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no man)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in whom he lives and moves 참조.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forthwith fːrθwith) 돌리지(turn tːrn) 않고는(without wiðut) 자기 자신을(himself himslf) 관찰할(survey sːrvi) 수 없습니다(no man can survey himself without forthwith turning his thoughts towards the God in whom he lives and moves).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즉시 돌려야만 비참한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소유할 수 있는 관건(關鍵 문빗장과 자물쇠)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piety piti)과 분별 능력의 원칙(principle prnspl)이라는 것이 칼빈주의(Calvinism)의 시조 칼빈의 지혜로우신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참조. 행 17:28)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 돌리지 않고는 끝없이(immense imns) 이어지는(series sriːz) 수치스러운(disgraceful disgrisfl) 소유 본능(property prprti)을 드러내는 인간 자신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2020-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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