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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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소강석 목사가 그의 한국대표 서정시 100인선 47호 시집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에서 세상의 왕관으로 나타난 코로나에게 부탁했다.

내가 왕관을 좋아하는지 어찌 알고
이 겨울에 화려한 왕관을 만들어 내게 찾아왔는지
...
내게 사랑이 부족했던 거야
미안하다 부디 겨울까지만 머물다가
다시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다오

그의 염원의 때가 아직 안 되었는지 이슬람 성지 메카 하람 대사원이 텅 비었다. 순례객으로 늘 북적이던 곳이다. 무슬림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메카 방향을 찾는다. 하루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기도하며 순례를 꿈꾼다. 하지만 빈 살만 왕세자가 실세로 군림하는 사우디 왕실은 성지 출입을 막았다. 올 7월 대순례도 취소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통곡의 벽 광장 역시 휑하다. 검은 옷 입고 귀밑머리 내린 초정통파 유대교 종교인(하레디)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도하던 곳,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며 경전 토라 모세오경을 읽던 곳이다. 너른 광장 위로 비둘기만 날고 있다.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예수탄생교회 광장과 예루살렘 성묘교회.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곳이기에 기독교인들이 그리워하는 곳이다. 지금은 인적이 드물다. 모두 코로나19가 가져온 생소한 풍경이다. 바이러스는 3대 유일신교인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의 성지를 비워냈다. 전쟁 때도 순례객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성지의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섞인 바이러스의 공포는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올해 4월은 종교에 잔인한 달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4월 8일부터 16일까지 유월절(passover)을 지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학정에 신음하던 히브리인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떠나기 전 겪었던 기적을 기념하는 절기다. 유대인에게 출애굽은 정체성의 근원이다. 이방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하는 민족사의 극적 장면을 간직한 해방의 날이기도 하다. 이때가 되면 옛 전통에 따라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굽고 저녁마다 경건한 만찬을 한다. 그러나 올 유월절은 달랐다. 이스라엘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미무나(Mimouna)라고 하는 유월절 이후 잔치를 최소화하도록 집마다 통제했다. 회당에 모여 토라를 읽으며 절기를 기념하는 집회도 통제했다.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내린 역병이 아닌 21세기의 역병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4월 12일은 기독교의 핵심 절기인 부활절이었다. 대개 성탄절이 더 크고 화려하고 밝은 절기로 비치지만 본질상 기쁨과 슬픔이 혼재한 절기이다. 아기 예수가 죽음을 위해 이 땅에 성육신한 날이기 때문이다. 반면 부활절은 순수한 기쁨과 승리의 절기다. 고난과 죽음을 이긴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교의 유월절처럼 올해 기독교의 부활절도 코로나19를 피하지 못했다.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 부활절 미사를 성도들의 참석 없이 집전했다. 코로나 사태로 피해가 극심했던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에서는 부활절 밤 색다른 공연이 열렸다. 오페라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가 홀로 노래를 부르며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든 성도를 위로했다. 많은 개신교회도 ‘모이는 예배’ 대신 ‘흩어져 드리는 인터넷 부활의 예배’를 드렸다. 부활을 믿지만 동시에 이 땅 공동체의 건강과 안전도 책임져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민이 담겼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략 4월 24일 금요일에 이슬람권에서는 라마단이 시작된다. 인류에게 코란이 계시된 날을 기념하며 무슬림들은 한 달간 금식한다. 이슬람의 5대 기둥이라는 행동 규범 중 하나다. 일출과 함께 금식이 시작되고 해가 지면 모여서 함께 예배한 후 곧이어 하루의 이프타르(Iftar) 만찬을 나눈다. 라마단의 현대적 의미는 금식을 통한 약자의 고통 이해와 연대다. 그러므로 매일 밤 만찬은 흥겹고 푸짐하다. 여유 있는 이들이 음식을 베풀고 함께 나누어 먹는 공동체의 축일이다. 특히 라마단 기간 밤에 별도로 드리는 타라위(Tarawih) 특별 기도는 알라 앞에서 공동체의 경건을 모으는 시간이다. 라마단만큼 이슬람 공동체의 속 깊은 결속과 연대의 정서를 다지는 시간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올해 라마단은 함께 모이기 힘들 듯하다. 이슬람권 각국 정부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올해 이프타르 만찬 및 공동 예배를 금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때 2020년 4월 21일 오전 10시 30분 새에덴교회에서 ‘총회 정년연구를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위원장 고영기 목사의 사회로 개회 예배를 드렸다. 교단 복음송 가수 김문기 장로가 특송을 했다. 코로나 역병 와중에도 총신 정상화와 총회 활성화를 위해 혼신을 다하는 제104회 정금(精金) 총회장 김종준 목사가 본문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에 의거해 ‘선택의 중요성’ 설교를 전했다. 김종준 총회장은 "정년제가 성경적이냐 아니냐가 선택의 관건이다. 전문가의 의견이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를 귀담아 들어야 된다. 성경을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인사 말씀을 하고 총회 피스메이커 김재호 목사가 축사를 하고 울산 큰바위 배광식 목사와 예수사랑교회 김진하 목사가 격려사를 했다. 그리고 제101회 총회 유리창 김선규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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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 고영기 목사의 공청회 취지 설명 뒤 연구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발제자 네 총신대 교수 가운데 서창원 교수의 ‘정년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양현표 교수의 ‘목사 정년 제도에 관한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연구-수요와 공급 측면에서’가 인상적이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에 의거한 ‘선택의 중요성’이라는 제104회 정금(精金) 총회장 김종준 목사의 설교와 교단의 목회자들이 당면한 현실에 맞는 발표는 서창원 교수의 연구주제였다. 그는 힘차고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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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년제 연구 부탁을 받고 연구하면서 느낀 것은 사실 정년제가 오래전부터 실시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체를 알고 보니까 굉장히 짧은 것이었습니다. 이 정년제가 실시된 것이 1992년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정년제가 없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분 그리고 신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보는 부분들을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결론은 저는 정년제 연장이 아니고 사실은 폐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년제가 본래 교회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여기 백과사전에 규정해 놓은 것을 보면 ‘정규직원이 일정한 연령이나 정해진 근무기간에 달하면 직장에서 자동적으로 퇴직시키는 제도’라고 정의했습니다. 본인의 의사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나이 제한에 의해 강제퇴직을 하는 것이 정년제입니다.
...
교회는 산업기관이나 기업이 아닙니다. 사업주 필요에 의해 정년제 도입이 필연적이었다고 한다면 교회 사역자나 직분자의 정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교회는 사업자와 노동자로 구성된 기업이 아닙니다. 때문에 교회에서의 정년제 언급은 세속사회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이윤 창출 기업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도록 훈련시키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정년제를 시행하기 이전 헌법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보면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조직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토록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 조항의 특이한 점은 교회 직분자의 항존직을 종신직으로 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규정된 것이 1970년, 1980년대 교회 급성장과 더불어 정년제 이야기가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통합 측에서 1969년 8월부터 한완석 목사와 임택진 목사에 의해 의논되기 시작했고 우리 교단은 한참 뒤인 1988년 73회 총회 때 김두만 목사 외 10인이 긴급 동의한 70세 정년제 시행 헌의가 처음 제기되었습니다. 여러 해 논의 끝에 1990년 김제중앙교회에서 열린 제75회 총회에서 가결되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 인천제이교회에서 제77회 총회에서 수정된 정년제 헌법을 가결하고 정식으로 우리 교단 내에서 실시되었습니다. 그 이후 정년제를 연장하자는 헌의안이 제출되면서 번번이 부결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2019년 제104회 총회에서 정년 연구회를 두어 연구해보자고 결의되어 2020년 4월 21일 오늘 공청회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년제 연장 반대 의견을 들어보면 목사 정년 연장은 안 된다. 사회 통념에 맞지 않는다. 공무원이나 기업의 경우 정년이 60세 정도이다. 총회가 70세로 결의하고 또 연장한다는 것은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 의견을 종합해보면 사회 통념상 안 된다는 것과 수요공급의 불균형 때문이라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정년제가 계속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년연장제가 계속 헌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가장 유력한 이유는 고령화 사회의 역할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정년제는 깊이 재고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산업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직자는 노동자가 아니고 교회 역시 물건을 생산해내는 기업이 아닙니다. 더더욱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는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요즘에는 이런 일들이 묵인되어 교회가 담임목사를 고용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목회자의 소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목회자의 소명을 받을 뿐입니다. 목회자의 소명의 확실성을 노회가 판단하고 추천하면 총회가 인준한 신학 훈련을 받고 총회 고시부가 검토하고 노회의 판결을 받고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장로교에서 교회는 노회가 파송한 목사를 받는 것이 장로회의 본래 원리입니다. 오늘 김종준 총회장님이 개회 예배 때 설교하시면서도 ‘전문가의 의견이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는지를 귀담아 들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을 따라가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주셔서 저의 오늘 주장도 굉장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대로 정년제로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목사를 부르실 때 너 70세까지만 목회를 해라 하고 부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편의상 성직으로 구분하는 목사직이 다른 직분과 달리 소명의식이 제일 중요시 됩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 등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은 나이 제한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아론 반열의 제사장은 나이 제한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도 나이 제한이 없었습니다. 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레위기 18:1절에서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출애굽한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듯 사회 통념상 정년제가 있으니 교회도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된다고 말하는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이집트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2장 2절에서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교회법을 정하면서 세대의 흐름을 따라 규정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 세상의 유훈과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규정해주신 규정과 말씀대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통념은 성경과 위배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법은 세상법이나 흐름에 기초해 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위배해서 제정될 수 없습니다. 왜 교회법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고쳐져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법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권위가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주장을 할 때 담임 목회자 자리를 기다리는 분들과 무거운 목회직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분들은 수요공급의 불균형을 이유로 혹은 교인들의 호불호를 이유로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성직에 정년제가 있다는 사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정년제에 대한 총회 결의는 반드시 재고되어야 합니다. 해외 어느 교단도 정년제 헌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조기 은퇴할 수 있는 자유는 개인의 양심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70세 정년 조항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 가톨릭 사제들도 정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독 (한국의) 개신교회만 성경에 위배되게 정년제를 사회 통념에 맞추어 실시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의사나 신체나 정신적 역량과 관계없이 70세가 되면 강제로 강단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도 완전히 위배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도 아예 정년제가 해당되지 않는 직분이 있습니다. 의사들이 그렇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영혼의 의사들입니다. 세상에서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에게도 정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송사를 변호하는 변호사들에게도 정년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을 대변하여 호소하는 영적 변호사입니다. 세상의 의사와 변호사도 정년이 없는데 왜 영적인 일을 맡은 목사의 정년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전문직에 속한 사람들도 정년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깊은 맛은 젊은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면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평생을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전문가 중 전문가인 목회자가 70세 되면 자연스럽게 물러나야 된다는 이 일은 교회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세기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휫필드가 말하듯이 ‘나는 녹슬어 못 쓰게 되기보다는 닳아서 사라지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그런 열망이 필요합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위해서 복음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아예 정년제 연장보다는 성경을 근거로 폐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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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기억을 매우 중시했다. 기억의 흔적이 표면상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그 심층부에는 남아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밀랍 종이 위에 글씨를 쓴다고 치자. 종이를 치워도 글자는 종이 아래에 새겨져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밑에는 모든 것이 보존된다. 지워진 것 같지만 마음 구석에 남아 있는 그것을 프로이트는 ‘기억의 근원’이라고 불렀다. 누가 기억을 헛되다고 했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 밖으로 나와 꽃이 되기도 하고 잊을 수 없어서 수만 개의 꽃잎으로 피어나는데 어느 누가 기억을 헛되다고 할 수 있을까. 하물며 인간의 기억이 그럴진대 성직자의 정년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을 우리가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믿음은 성경이 금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지를 잘 파악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기회를 찾고 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정년제에 대한 공청회의 제104회 총회장 김종준 목사의 설교와 서창원 교수의 제언은 신앙의 제반 사항에 대해 말씀을 제일로 삼는 우리 보수 교단의 유지와 성장을 위한 성직자의 위상과 역할을 되찾는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2020-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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