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김환기의 우주3.JPG
 
김환기(1913~1974)의 대작(大作) "우주"(Universe)가 홍콩 경매에서 132억 원을 기록했다. 한국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다. 값을 떠나 이 작품은 광활하고 오묘하다. 하지만 이론물리학이 그리는 우주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과학으로 관측할 수 있는 물질(별과 은하+성간물질)은 우주 전체의 4%에 불과하다. 우주의 대부분은 불가해한 암흑물질(23%)과 암흑에너지(73%)이거니와 정말로 놀라운 건 나의 탄생이다. 이 우주에서 내가 태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주가 생겨날 확률, 생명체가 진화할 확률, 지구에서 내가 수태될 확률을 곱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은 "이 우주가 왜 있는가"를 묻는다. 인간의 마음이 우주와 일대일(一對一)로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수학에서 "구골(Googol)"이라는 단어가 있다. 구골은 10의 100 제곱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즉 1 뒤에 0 이 100개나 달린 거의 무한대 숫자이다. 그래서 이 구골은 우주의 모든 원자의 수보다 많은 엄청나게 큰 숫자이다. 바로 이 "구골"이라는 단어를 따서 현재의 글로벌 선두 기업인 "구글(Google)"이라는 회사명이 탄생했다.
 
이세돌과의 바둑 대결을 통해 알파고(Alphago)를 목격한 우리 사회에선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이가 많다. 그러나 난 요즘 영화에서처럼 자기성찰과 공감능력을 지닌 기계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연산 능력과 추론은 지능의 주요 기능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계산 능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 형상을 닮은 피조물 인간은 삶과 우주의 의미에 대해 궁극적 질문을 던지고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며 연민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019년 보수 교단이 기도하는 대한민국에선 공감과 연민은커녕 생각이 다른 이들을 난폭한 말로 서로 난자(亂刺)했다.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야 할 언어가 흉기가 되어 서로를 베었다. 하늘을 찌른 진영 간 적대와 증오 앞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음자리가 초토화되었다. 진영 논리가 비판적 사유(思惟)와 상상력을 질식시켰다. 오직 "우리 편" 여부만 따지는 세태 속에서 정치는 전쟁으로 타락하고 정의는 허공에 흩어졌다. 총회는 납골당 매매 등기이전 소송을 하면서 드러낸 믿음에 근거한 진실한 자기성찰과 공감 능력이 사라진 곳에 신자의 죄의식은 물론이고 인간다운 염치와 부끄러움이 남아날 리 없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벌거벗은 동물의 세계로 추락했다. 말 그대로 헬조선이 되었다. 총회가 이 시대 빛이 되어야 할텐데 하나님 말씀 그대로 거짓의 아비 마귀 자식들이 되어 거짓을 일삼으며 권력과 황금에 갇힌 자들처럼 어둠 속을 활보한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에서 나라를 세웠고 국가 멸절(滅絶) 직전의 6·25전쟁에서도 살아남아 믿음으로 세계 제일의 기독교계를 세우고 열정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을 일구고 바른 지성과 행동으로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한국의 기적"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던 한국 기독인의 믿음과 기도와 땀이 오늘의 성취를 추동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는 자기 불신을 허락하지 않는 믿음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선택을 받은 우리에겐 절망하거나 타락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세밑과 새해로 분별한다. 우리네 삶에다 의미와 소망의 무늬를 입히기 위해서다. 한 해의 끝, 밤하늘의 별빛에서 "우주 속의 나"를 보는 건 절망을 딛고 희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미미한 인간이 만나는 체험이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현대 과학이 뒷받침하는 실존 경험이다. 인간은 잠깐이나마 나사로가 내려다 본 지옥 같은 현실을 넘어선 성찰의 순간을 가져야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김환기는 작품 "우주"와 함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걸작을 남겼다. 시인 김광섭(1906~1977)의 시에서 빌려온 제목 자체가 존재 물음에 대한 심원한 응답이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꽃 한송이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나자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 우리 모두 국가와 총회의 내년 전망은 어떨지 역사와 현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자.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JPG
 
나이 든 사람일수록, 더구나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걸 바꾸는 순간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세계관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조국이 그리고 전계헌과 박상범이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자와 실세가 가상현실의 나라를 향해 치달을수록 진짜현실의 민초들은 고단해지기 십상이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가 외교와 안보의 냉엄한 현실을 제대로 못 보면 국민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7대 술탄 메흐메드 2세. 이후에도 서방 기독교세계 정복사업을 펼친 그는 잔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곤 정복지의 지배층을 모조리 살해하기도 했다. 이를 전해들은 다른 곳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전을 펼치자 ‘항복하면 알라께 맹세코 목을 베지 않겠다’고 약속해 문을 열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지켰다. 목이 아닌 몸통을 베어 수비군 전원을 살해했다. 역사는 잔인했던 메흐메드 2세를 정복자로, 공포심에 눌려 그의 약속을 믿고 무장해제를 결정한 사람은 무능한 지도자로 기억한다.
 
북한 김정은이 바로 메흐메드 2세 같은 잔학무도한 그런 놈이고 그런 놈을 믿거나 언행이 닮은 작자는 무능한 지도자이거나 거짓 목사일 것이다.
 
인간은 상상력 말고도 날개가 있다. 미국 시인 랭스턴 휴스는 "꿈(Dreams)"에서 그걸 노래한다.
 
꿈을 단단히 붙잡아요
꿈을 잃으면 삶은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와 같으니까요 

 
그래서 믿음의 독수리 날개( 사 40 : 31)를 가지고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바라는 부활 소망을 믿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계 22:21).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 말씀을 들은 자가 대답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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