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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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총회 크리스마스 선물
총회 개혁 위해 썩고 곪은 은급재단 이사 공모 사문서위조와 전 총무 거짓 사실확인서
변호사 통해 중앙지법 제출 사실로 드러나.
 
우리도 이제 성탄절에 영국 왕실 관습처럼 "Happy Christmas"라고 하면 어떨까. 진보 좌파처럼 거짓을 일삼는 총회 부패한 계층의 소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천박함을 서로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다.
 
크리스마스에 주고받는 선물은 김상윤과 전계헌처럼 은밀히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마음이 담긴 뜻을 전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물자가 부족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선물은 빈한한 일상을 보완하는 경제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음식과 문구류, 의복과 가축 등 생활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선물로 사용되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잔과 도검, 벗에게 보내는 종이와 벼루 등에는 충성과 우정을 담보하는 사회적 상징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은 역시 퓨리탄 puritan이라는 그 이름답게 성경적 믿음에 근거해 크리스마스 축제를 금지했었다. 예수 탄생일이 12월 25일이라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평일로 지정하고 적발되는 자에게는 벌금까지 부과했다. 제네바의 칼빈처럼.
 
당시 많은 주민은 오랜 전통에 따라 겨울 동지 축제를 구실 삼아 술에 취해 흥청거렸는데 크리스마스도 핑계가 됐다. 교회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런 전통을 뿌리 뽑지 못했고 결국 12월 25일을 기독교 명절로 전용하게 됐다.
 
그 과정에 "메리 크리스마스"는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무례한 민중이 술에 취해 고함치던 인사말이었다는 것이다. 실상은 신앙적 역행과 흥청거림의 세속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19세기 들어 분위기를 들뜨게 해 소비를 부추기려는 상업주의에 따라 확산되면서 가장 선호하는 구호가 됐다. 이어 1843년에 등장한 크리스마스 카드 문구와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라는 캐럴송을 통해 세계 공통 인사말로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자 교회는 1940년대 들어 논쟁을 포기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용어에 포함하기로 했다. 대신 그 대책으로 백화점 등 상가 진열장과 광고에 예수의 탄생 장면 등 기독교 이미지를 최대한 사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노골적으로 기독교 표현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른 종교 신자나 무신론자 고객들에게 거부감을 줘 매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1990년대 이후엔 "Happy Holidays"로 바꿔 다는 곳도 많아졌다. "holiday"라는 단어도 "holy day(거룩한 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종교 색채가 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일 축하 때 "Happy Birthday" 등은 "happy"를 쓰는데 왜 유독 성탄절만 "Merry Christmas"라고 하는 걸까. "happy"는 감정적 상태를 나타내는 데 비해 "merry"는 동사 느낌의 활동적인 어감을 풍긴다.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가자는 활동성을 가미한 것이다.
 
"Happy Christmas"라고 하면 틀리는 걸까. 영국과 아일랜드 등에선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특히 왕실에선 꼭 "Merry" 대신 "Happy"를 쓴다. "Merry"는 하층 계급의 소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천박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은 덧셈보다 뺄셈이 좋다. 외식 같은 군더더기를 빼 단순할수록 실용적이고 아름답다. 목사는 마음에 담긴 영혼을 믿음으로 구현하려는 일을 해야 한다. 여백 가득한 들판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느껴지듯. 가난한 심령이 말로 가득 찬 신앙보다 더 풍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제 그림을 그렸으면 지나간 화가, 오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누구나 화가, 어제 시를 썼으면 지나간 시인, 오늘 시를 쓰고 있으면 누구나 시인. 어제 설교를 듣기만 했으면 지나간 신자, 오늘 설교를 실천하고 있으면 누구나 목사.
 
이해관계가 인간의 양심을 빼앗아가는 시대, 목사로서의 경쟁력은 정서적 문해력과 공감 능력에 달려있다. 신세대로 일컫는 밀레니얼 세대와 소통하고 일하기 위해서도 공감 능력은 필수다. 하지만 단순한 동정심의 "동조(sympathy)"는 금물. 이는 오히려 진심 어린 동병상련 감정이입의 "공감(empathy)"을 가로막는다. "그래 정말 힘들겠어!"라며 건성으로 안쓰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래(Me, too)"라며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 "공감"이다. 교인에 공감하며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명확한 경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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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총회 회복에 딱 맞는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제104회 총회장 김종준이 외치는 회복이 총회의 칼빈주의 회복에 아주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썩고 곪은 총회 은급재단(이사장 김종준) 이사회 공모 사문서위조와 전 총무 거짓 사실확인서를 빼도박도 못 하게 변호사를 통해 중앙지법에 제출한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교단 개혁의 불쏘시개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도 이제 성탄절에 영국 왕실 관습처럼 "Happy Christmas"라고 하면 어떨까. 진보 좌파처럼 거짓을 일삼는 총회 부패한 계층의 소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천박함을 서로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다. 나아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주인공 지독한 스쿠르지 영감의 개과천선을 하고 구원 받는 체험을 하기 위해.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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