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 사태의 실망과 소망
2018/03/21 18:1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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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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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비폭력 인권 운동가 킹 목사와 달리
 
총신 출신 목사로서 총신대 사태에
실망과 소망이 있다
 
실망은 개혁 신앙을 가진 우리의 문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믿음이 없는 세상에 알리고
세상이 인정한 것을 당연시 여기고
좋아한다는 것
 
소망은 믿음 없는 세상도 우리와 달리
폭력이 아닌 법대로 처리하는
엄정한 법집행 관행이 있다는 것
 
믿음의 기도드리고 나면 뒤에 남는 것이 없어 좋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그 약속 허물고 또 그래도 결국은 푸른 하늘뿐이어서 좋다. 한 행의 말씀 읽고 나면 부담이 없어서 좋다. 설교를 쓰고 지우고 결국은 흰 여백뿐이어서 좋다. 평범한 목사 남기는 유산이 없어서 좋다. 벌고 쓰고 헌금하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흙이니 흙이 돼도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다.
 
성경을 벗어나면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안다고 하는 말들도 사실은 입증되진 않았다. 우리는 삶을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안다는 듯 살아간다. 분명한 건 아무것도 쥐지 않고 왔다가 때가 되면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생명은 다 내려놓고 간다는 사실뿐. 이걸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어느 때는 이렇게 없음이 좋아지는 건지도 모른다. 구름 없는 하늘, 텅 빈 백지, 그리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 3월 22일 구속 영장 심사를 앞두고 다스 실소유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게 검찰 주장이니 장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마음은 어떨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던가. 더디고 답답한 법이 사람들의 정의감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불만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의 부정’(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이라는 법언(法諺 법에 관한 격언이나 속담)도 이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영국의 19세기 명재상 글래드스턴이 이 격언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모두 합하면 72권의 방대한 책 탈무드를 6부로 나누었을 때 4부 중 9번째 책 ‘피르케이 아보트’(선조의 교훈)에 ‘정의의 지체와 부정이 세상에 칼을 불렀다’는 구절로 봐서는 그 연원이 2000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피르케이 아보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의 금언도 기록되어 있다. ‘내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살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나는 무엇이겠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피르케이 아보트 1:14).
 
아울러 “시골뜨기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피르케이 아보트 2:6)도 기억에 남는 글귀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범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쨌든 ‘정의의 지체와 부정이 세상에 칼을 불렀다’는 말이 법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할 때 쓰는 단골 인용구가 된 것은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공이 크다. 1963년 앨라배마주 흑인의 합법적인 평화 시위를 돕다 투옥된 킹은 “흑인들에게 ‘기다려라’는 말은 ‘안 돼’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라고 외쳤다.
 
컨테이너로 총신대 건물 두 동 출입구마다 막아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일부 학생들의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용역이 동원되어 통로를 열고 4층 전산실을 회복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사건을 국회에서 한 국회의원이 불법으로 거론하고 교단 자체의 힘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성토하고 문교부 당국의 개입을 촉구했다. 그에 띠라 기독교계 문제 보도라면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유력 일간지와 방송들이 그것을 뉴스거리로 보도했다. 국회의원의 지적과 여론의 보도에 교육부는 3월 19일 총신대에 공문을 보내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학생들이 제기한 민원과 학사·인사·입시 운영 현황, 회계 관리 현황, 이사회 운영 전반 등을 조사하겠다고 통보했다. 교육부가 2014년도부터 2018년 3월 1일까지의 회계연도 예·결산서를 요구하고 학사와 이사회 운영 전반을 광범위하게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이런 믿음이 없는 세상의 실태에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교계 언론과 목회자와 신학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하는 의구심과 걱정이 앞선다.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1930년대 미국 경찰의 강압적 수사 방식에 제동을 건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버금가는 가장 유명한 말은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행한 ‘I have a dream’은 미국사회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그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 그리고 평화공존에 대한 그의 소망과 신념을 담은 유명한 연설이 되었다. 1964년 그는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에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로 무더운, 억압의 열기로 무더운, 저 미시시피마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킹 목사와 달리 총신 출신 목사로서 총신대 사태를 바라보며 느끼는 실망과 소망이 있다. 실망은 개혁신학 신앙을 가진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음이 없는 세상에 알리고 세상이 인정한 것을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망은 믿음이 없는 세상임에도 우리가 보기에 이러든 저러든 폭력이 아닌 법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성경의 믿음이 없지만 엄정한 법집행의 관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상징으로 세상 사람들은 안대를 두르고 저울과 칼이나 법전을 든 유스티티아를 정의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서구에서는 법과 정의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인격화시킨 정의의 여신상을 법의 상징물로 여겨 각 도시의 시청, 법원, 광장 등에 세웠다. 유스티티아(Justitia)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이름은 라틴어로 정의를 의미하며 영어의 ‘정의’(Justice)란 단어가 여기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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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상은 각 나라의 시대와 사회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형되어 묘사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지 않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그리스의 여신 디케는 칼만 쥐고 있었으나 로마의 유스티티아에 이르러 공평의 의미가 가미되어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의 여신상이 만들어졌다. 여신이 들고 있는 상징의 의미는 이렇다.
 
정의의 여신상의 저울은 ‘법 집행에 있어 편견이 배제된 평등’을 상징한다. 법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해야 한다. 평등한 법 집행을 하겠다는 뜻으로 평형저울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형평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칼은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뜻으로 국가의 위하력(겁을 주어 범법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으면 따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엄격히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법의 엄격한 집행’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법전은 말 그대로  ‘법전에 의한 법적용’을 뜻한다. 법은 법전에 의해 기억되기 때문이다.
 
가린 눈이나 눈가리개는 사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공정하게 집행하겠다는 뜻이다. 즉 ‘공정성’을 뜻한다. 그냥 눈을 뜨고 본다면 사람을 차별하지만 눈을 감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짐이 없는 공평함’을 뜻한다.
 
정의(正義)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이념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짐꾼 아모스를 통해 말씀한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dgment run down as waters, and righteousness as a mighty stream.
아모스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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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1
 
[ 김영배 ethegoodnews@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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