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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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만 남은 자아의 묵시록
 
실사 개봉 앞둔 원작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 감독 : 오시이 마모루
만화 원작 : 시로 마사무네
 
만화나 애니메이션 작품에는 유독 자신의 정체성을 회의하고 탐구하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따위의. 특히 스크린을 통해 표현되는 유사 표현매체인 영화에 대하여 애니메이션은 바로 이 점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두 매체가 모두 시나리오에서 출발하지만, 영화는 배우의 연기라는 '통역' 과정을 거친다. 감독이 연출 지도를 한다 해도, 진한 내면의 페이소스는 어차피 배우의 몸과 영혼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서 연기를 하는 것은 '그림(캐릭터)'이다. 배우라는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는다. 
 
그림(캐릭터)을 그리는 것이 곧 연기 행위인 셈인데, 그 몰입의 과정에서 작가의 머릿속에는 온갖 고뇌와 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고뇌로의 몰입, 혹은 몰아의 고뇌다. 이 몰입은 캐릭터의 출산 작업인 동시에, 작가가 자신의 번뇌를 형상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몰아의 번민은 대개 존재론적 탐구, 혹은 구도적 회의의 형태를 띠기 십상이다. 때로는 한 장의 캐릭터가 시나리오의 줄기를 바꿔놓기도 한다. 주인공의 핏빛 고뇌가 애잔하게 배어든 한 컷의 캐릭터는 천 마디의 대사를 압도한다. 극단적으로는, 주인공 캐릭터의 고뇌를 펼쳐가기 위한 내러티브로서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가 좋은 본보기다.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마천루 꼭대기에 주저앉아 짧은 머리를 흩날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한 여인이 보인다. 우수에 찬, 그러면서 야무진 표정의 20~30대 여인. 이 한 컷의 캐릭터로서 <공각기동대>의 오프닝은 완벽하다. 이 작품의 주제와 기조, 뉴앙스, 시대 배경 따위가 ‘원샷’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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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이름은 쿠사나기 모토코. 계급은 소령. 총리 직속의 특수부대인 ‘공안9과 공각기동대’의 행동대장이다. 이어폰을 통해 모종의 지시가 전달되고, 여인은 말없이 옷을 벗는다. 눈부신 나신으로 홀연히 빌딩 아래로 몸을 던지는 쿠사나기 소령. 이 투신 시퀀스는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제5원소> 그리고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시리즈의 몇몇 장면과 정확하게 오버랩된다. 곧이어 벌어지는 총격전. 쿠사나기 소령은 빌딩 중간쯤의 어느 고층에 멈춰 목표 인물을 정확하게 제거하고 나비처럼 날아 귀환한다. 
 
고뇌하는 여인의 상징적 캐릭터. 그리고 임무 수행. <공각기동대>는 이 오프닝이 던진 의문을 설명하는 동안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관객의 오감을 완전히 흡인한 상태에서 엔딩으로 직행한다. 완벽에 가까운 플롯이다. 이 매끈한 흐름은 전적으로 오프닝에 선보인 쿠사나기 캐릭터의 힘이다. 
 
쿠사나기 소령은 뇌와 척추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신이 기계 몸체로 이루어진 사이보그다. 시대는 2029년. 컴퓨터 네트워크가 지배하는 최첨단 디스토피아 세계. 의학과 과학의 수준이 절정에 달해 훼손된 육체는 무제한으로 복구되어 기계 몸체로 대체되는 시대. 인간의 실존으로 존재하는 것은 영혼뿐이고, 그 ‘영혼(Ghost)의 집(Shell)’으로서 뇌의 보존이 더없이 중요시된다(<공각기동대>의 원제가 이다). 뇌의 진실마저 컴퓨터 네트워크의 지배를 받는 세상, 따라서 뇌 속의 ‘고스트’를 해킹하는 범죄가 최악의 만행이 되는 시대다. 
 
그런 상황에서 ‘고스트’를 마음대로 해킹하는 희대의 해커가 등장한다. 인형사,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형사는 뇌 속의 고스트를 해킹하고 엉뚱한 기억을 입력시켜, 그를 자신의 뜻대로 (인형처럼) 조종하는 해커다. 쿠사나기 소령의 ’공각기동대‘는 고스트 해킹을 척결하는 것이 주임무인 특수부대다. 
 
쿠사나기 소령은 침착하고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 작전 수행에 한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를 견딜 수 없게 괴롭히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인가, 사이보그인가? 나의 삶, 행동, 판단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프로그램의 실행인가? 완벽한 사이보그 몸체를 지휘하는 한 줌의 뇌, 이 뇌가 곧 나인가? 어쩌면 나는 훨씬 이전에 죽었고, 지금의 나는 전뇌(電腦)와 의체(擬體)로 구성된 모의인격이 아닐까?’ 
 
쿠사나기 소령의 대척점에는 인형사가 있다. 인형사는 ‘공안6과’에서 공작을 위해 개발한 ‘인조지능’ 수준의 해킹 전문 프로그램이었다. 초능력에 가까운 인형사의 네트워킹 능력은 곧 공안6부의 통제를 벗어나 자율적 프로그램으로 진화한다. 위기를 느낀 공안6부는 인형사 제거에 나서고, 이를 감지한 인형사는 100% 기계 몸체인 사이보그의 외형을 빌려 공안9과에 망명을 신청한다.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다. 국가 차원의 공작에 휘말려 정식으로 망명을 신청한다. 21세기의 과학은 아직도 생명의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한다.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존재하는 생명체로서 나의 망명을 받아달라.’ 
 
그리고 둘의 중간적 존재로서 인형사의 해킹을 받은 청소부가 있다. 독신 홀아비인 청소부는 인형사가 입력한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가출한 아내와 딸을 찾아 인형사의 해킹 행위를 대행하다가 체포된다. 청소부의 뇌리에 각인된 기억은 허상이다. 육체는 100% 인간이지만, 청소부는 허상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오시이 마모루가 던지는 묵시록적인 물음. 이미 허깨비가 되어버린 100% 육체의 청소부와, 육체는 0% 영혼은 100%인 컴퓨터 프로그램 인형사, 그리고 한 줌의 뇌와 척추말고는 모두 사이보그 몸체로 이루어진  쿠사나기 소령. 그리고 고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기준은 무엇인가? 
 
198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이후 SF영화는 상상력의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다. 사이보그 몸체의 불완전성과 ‘추억의 부재’ 문제를 기초 컨셉트으로 삼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라는 <블레이드 러너>의 패러다임은 그만큼 막강한 카리스마를 구가했다. 그리고 1995년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가 발표됨으로써 비로소 <블레이드 러너>는 전설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96년부터 <공각기동대>는 베를린영화제부산영화제헬싱키영화제.상파울로영화제 등 전세계 영화제로부터 줄초청을 받았고, 최고 권위의 애니메이션영화제 ‘The World Animation Celebration'에서 최고작품상을 수상했다. 발매된 비디오는 미국의 비디오 판매순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 절정을 구가했다. 
 
이후 <공각기동대>는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등의 SF영화들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뤽 베송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내 영화 <제5원소>의 상상력은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했다. <제5원소>의 여주인공 ‘밀라 요보비치’가 빌딩에서 낙하하는 시퀀스는 뤽 베송이 마모루에게 바치는, 그리고 <매트릭스 2 리로디드>에서 트리니티가 나신의 곡선을 한껏 드러내는 꽉 조이는 검은 가죽옷 차림으로 빌딩에서 몸을 날리는 오프닝 시퀀스는 워쇼스키 형제가 마모루에게 바치는 오마쥬였던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스크린 가득히 흘러내리는 알파벳의 디지털 이미지들, 주인공이 목 뒤의 구멍을 통해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설정 등도 <공각기동대>의 오마쥬로 읽히며, <코드명 J>(로버트 롱고 감독)의 두뇌 해킹,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이보그의 자아에 대한 고뇌 등도 같은 맥락을 벗어나지 못한다.  
 
box : 저패니메이션의 신성 오시이 마모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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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초기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의 차세대 주역으로 꼽히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공각기동대>를 통해 세계 초일류의 반열에 오른다. <공각기동대>는 오시이 마모루의 천재성이 한껏 발휘된 작품이다. 1995년에 처음 발표(제작 기간을 감안하면 최초 구상은 훨씬 이전)된 작품임에도 그 시대적 통찰과 섬세한 디테일들이 20년이 지나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눈부시다. 더구나 당시는, 지금에 와서야 ‘정보의 바다’로 불리는 인터넷이 막 걸음마를 떼던 무렵이었다.
 
1951년 도쿄에서 태어난 오시이 마모루는 유년 시절부터 극장을 드나들며 SF영화와 공상과학소설에 심취한 오타쿠였다. 70년 동경학예대학 미술교육학과에 입학하면서 마모루는 영상예술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8mm와 16mm 영화를 찍는 영화광이 된다. 1년 동안 감상한 영화가 1,000편이 넘을 정도였다. 대학 졸업 후 <독수리 5형제>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다츠노코 프러덕션에 입사하면서, 오시이 마모루는 진로를 애니메이션으로 돌리게 된다. 비사교적이고 폐쇄적인 자신의 기질이 집단 제작 시스템인 영화보다 애니메이션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1981년 인기 만화가 다카하시 루미코 원작의 <우르세이 야츠라> 시리즈로 데뷔한 이후, 일본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위선을 폭로할 의도로 제작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원작 유키 마사미)가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이끌 재목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그밖의 대표작으로 <천사의 알> <붉은 안경> <케로베로스 지옥의 파수견> <마로코> <아바론> 등이 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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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 에세이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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