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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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탄생 100주년
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바라볼 수 없는
아름다운 주름으로 덮인 얼굴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하나님 말씀을 모시는 성전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
 
아비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쉰셋 막내아들은 꽃다운 스물한 살. 그의 죽음을 듣고 정유년(1597) 10월에 남긴 난중일기의 기막힌 기록이다.
 
10월 14일(신미) 저녁에 천안에서 사람이 와 집안 편지를 전하다. 대충 겉봉을 뜯고 본즉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막내 아이 면의 전사를 알다.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통곡하다. 하늘의 어질지 않음이 어찌 이러한가. 슬프다 내 아이야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 죄가 많아 네게 미친 것인가.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이 일 년 같다.
 
10월 16일(계유) 내일로 막내 아이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다. 마음대로 통곡할 수 없어 영내의 강막지 집으로 가다.
 
10월 17일(갑술) 맑다. 자식의 복을 입고 새벽에 곡하니 비통함을 견딜 길 없다.
 
여기서부터 멀지 않다. 그러나 장장마다 속이 깊은 검은 성경을 타고 새 에덴의 생명나무가 피는 마을까지 천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 여기서부터 캄캄하고 아득하게 먼 길을 가고 있다. 각자의 여기는 다 다르지만 장장마다 속이 깊은 검은 성경의 말씀을 타고 말이다. 그곳은 누더기 같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도 싱싱한 생명나무로 살리는 곳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은 모질게도 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아름다운 주름으로 덮인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울다가 웃음 반 울음 그친 얼굴이다. 그래서 웃음 반 울음 반 소리는 그릇을 놓쳐 가며 하는 설거지 같은 여울물 소리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28세) 후쿠오카 감옥에서 바닷물을 걸러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조국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죽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 방송을 웅얼거린 뒤 심훈이 예언자처럼 외쳤던 광복을 했다. 그리고 1948년 1월 그의 유고(遺稿)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유고 시집이 간행되었다. 그 뒤에야 우리는 윤동주가 잔혹한 일제 암흑의 시대를 밝힌 순결한 영혼의 시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시집에 실린 그의 시에는 소년다운 순결한 의식과 기독교의 참회 정신이 깔려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해’ ‘달’ ‘별’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자식들 아명도 이와 연관해 지어 주었다. 첫째인 동주에게는 ‘해처럼 빛나라’는 뜻의 해환(海煥), 둘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고. 윤동주 시인은 고향인 북간도 용정 ‘명동’에서 이런 아명을 갖고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자연을 벗 삼아 시인의 감수성을 키웠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이라고 노래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미 그때 잉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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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8일 주일 저녁 7시 새에덴교회 3층 프라미스홀에서 주일 저녁찬양예배를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추모 예배와 음악회로 가졌다. 사회를 맡은 윤동현 목사가 글로리아 찬양단의 찬양으로 예배 시작을 알렸다. 김연호 목사 지휘로 글로리아 찬양단의 장엄한 찬양이 성도들로 가득한 프라미스홀을 믿음의 언약으로 채웠다. 이어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대하소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全 5권 2012 해냄)의 소설가로 등단한 장충식(단국대이사장) 장로가 묵직한 바리톤으로 대표기도를 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주신 하나님 우리 민족 역사의 암흑기 일제 잔혹한 만행과 억압으로 캄캄할 때 별의 시인 윤동주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회중 아멘)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음을 맞고 떠난 님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저항과 사랑의 별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길을 잃고 황량한 벌판에 서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고심하고 있습니다. 주여 하루속히 우리 민족이 길을 찾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거칠고 험한 광야를 지나 주님의 장막에 거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윤동주 시인이 남기고 간 사랑과 용서 화해와 저항의 시절이 우리 민족의 가슴을 비추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또 다른 별의 시인이 되어 새로운 대한민국 비상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윤동주 시인의 추모 음악회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과 희망이 꽃피우게 하옵소서. 침묵의 밤을 밝히는 용서와 화해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다시 순례자의 가슴으로 저 새벽길을 걷게 하옵소서. 추모 음악회를 준비한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님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새에덴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전하는 민족 구국 제단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야의 영성과 순종의 스승으로 복음을 외치고 시를 쓰는 소강석 목사님을 민족적 제사장이요 시대의 선지자로 더 위대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음악회를 공동주관하는 한국문인협회와도 함께하셔서 우리 민족의 가슴을 문학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여 국민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음악회를 인도하는 윤형주 장로님에게 풍요로운 영성과 감성을 주셔서 오늘 음악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에게 큰 감동과 은혜가 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음악회를 통하여 윤동주의 정신이 살아나고 이 땅에 저항 시인과 애국 시인이 많이 태어나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음악회 모든 순서를 주관해 주시고 우리 심장이 다시 뛰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별빛 같은 사랑을 따라 허락하게 하옵소서. 하여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서게 내일을 향해 비상하는 꿈과 희망의 음악회가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글로리아 찬양단의 아멘송이 천사들의 환영 소리처럼 장엄하게 이어졌다. 윤동주 시 ‘십자가’에 곡을 붙인 찬양을 새에덴연합찬양대 천사의소리합창단이 새에덴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앳된 소리와 여문 소리가 어울려 합창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리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리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리다
 
윤동주 시인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소강석 목사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으로 기념 메시지를 전하기 전 소강석 목사의 요청으로 새에덴연합찬양대가 ‘십자가’ 노래 후렴을 다시 찬양했다. 뜨거운 갈채가 있었고 그리고 시인 소강석 목사의 시론(詩論)과 윤동주 평전(評傳)이 이어졌다.
 
“요즘에야 사람들이 시(詩, poetry)를 개인의 서정성을 운율에 맞춰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시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를 언어예술이기 이전에 신전(神殿)에 임한 말씀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詩이며 이는 말씀 言(언)과 절 寺(사)가 합쳐진 형성자입니다(여기서 言이 의미기호 寺가 소리기호이고 시는 言 즉 언어가 그 의미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이름). 그런데 寺(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절 사(寺)이지만 중국에서는 관청 시(寺)입니다. 이곳은 왕과 재상들이 백성을 다스리던 곳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때에는 땅의 왕을 하제(下帝)라고 부르고 하늘의 왕을 상제(上帝)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천자 같이 이 땅에서 통치하는 하제는 하늘의 상제 말씀을 잘 받들어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하제가 하늘의 상제의 말씀을 받은 것을 바로 뭐라고 했느냐면 시(寺)라 그랬습니다. ‘寺’는 손 우(又)와 마디 촌(寸)이 합쳐진 것으로 본디 ‘모시다’라는 의미였고 말 그대로 풀이하면 ‘말씀으로 받들어 모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神殿) 즉 하나님 말씀을 모시는 성전(聖殿)이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신탁(神託)을 받아서 왕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바로 고대의 시인이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고대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역할을 했고 신과 인간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 즉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적어도 시대를 읽고 그 시에 당대의 예언자적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시인은 우리 민족의 예언자적 시인이고 제사장적 시인이라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곳은 우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이 몰려드는 집합소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신앙의 독실한 장로이고 민족의 선각자이셨습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할아버지가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대주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김약연은 명동촌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목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깊은 기독교 신앙과 애국혼을 가슴에 지니고 자랐습니다. 그의 시에는 그런 정신이 바탕이 되어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시로 표현된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정신이 나타난 윤동주의 ‘눈 감고 간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강대상 벽면 화면에 시가 떴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이 시에서 ‘태양과 별’은 조국의 독립을 상징하고 ‘밤의 어둠’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형상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밤이 어두운데 눈을 감고 가라는 것은 반항이고 저항입니다. 눈을 감고 가라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역설적 희망을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고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뜨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계기로 삼아 전진을 하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말입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사는데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지성인으로서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비극적인 현실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잎새 같은 유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섬세하고도 순혈적인 자세로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것은 조국을 위해 바람과 별을 안고 주어진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필연적인 길은 무엇입니까. 저항의 길이요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영혼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의 세계를 바로 해석하는 것이겠지요. 오늘의 괴로운 현실과 시련이 아주 차갑고 냉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겠지요. 저보다도 한 평생을 국문학에 헌신한 강희근 교수님도 계시고 오늘 문협의 이사장님도 와 계십니다. ‘십자가’ 시를 1941년에 지었는데 이때는 일제의 압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입니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쫓았던 햇빛의 이미지로 말하지만 광복의 축복이 아직은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광복과 해방은 멀었습니다. 오직 광복은 저 십자가에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더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허락하신다면 자신의 꽃처럼 피어나는 젊음의 피를 어두워져 가는 민족의 제단에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그의 ‘서시’와 ‘십자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다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그의 시와 꽃처럼 피어나는 삶의 피를 제물로 민족의 제단과 하나님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는 예언자적이고 제사장적인 시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윤동주가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고 노래한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항정신을 넘어 온 세상이 평화롭게 사는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적 시요 온 세상에 위로를 전하는 제사장적 시입니다. 그리고 그는 후쿠오카 감옥으로 잡혀갔습니다. 윤동주는 서정적 시인으로서 보편적 인간애를 정말 순수하게 표현한 시인으로도 유명해 일본 사람들 가운데도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청록파 시인처럼 시대 저항과는 아무 상관없는 시인이 아니라 당대의 예언자적이고 제사장적인 시인이었으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애국 저항의 시인이기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후쿠오카 감옥에 갇혀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바닷물을 거른) 생체주사를 맞고 죽습니다. 그가 ‘십자가’라는 시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민족의 제단에 그의 시와 생명을 화제로 바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윤동주하면 비극적 시인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희생자요 모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삶이 더욱 애절하고 더욱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해로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시적 화자와 일체화를 이루어 윤동주의 평전(評傳)과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시집을 펴냈습니다. 오늘 또 추모음악회를 하게 되었는데요. 추모음악회를 통해 윤동주 시인의 저항정신과 애국정신을 깊이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이 여러분의 가슴을 그야말로 물들일 수 있기를 바라고 글사랑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큰 박수)
 
테너 박완 교수(팝페라 가수 연세대교수)가 소강석 작사 작곡 “윤동주 추모곡”을 불렀다.
 
님은 갔지만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떠나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소강석 목사가 축도로 1부 기념예배를 마쳤다. 그리고 2부 추모 콘서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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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의 육촌 동생이고 70년대 통기타 문화 창시자 윤형주(1947. 11. 19 ~ ) 장로가 기타를 메고 교인들의 열화 같은 박수 속에 강단 왼쪽에서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그러면 그는 달변이 된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다. 방송사 마이크를 타고 전국에 퍼졌던 그의 잔잔한 음성이 프라미스 홀을 가득 채운 성도들 귀와 마음을 목마른 사슴이 마시는 물 같이 채웠다.
 
“저는 오늘 두 곡의 찬양을 먼저 부르려고 하는데요. 130년 전 캐나다의 선교사들에게 하나님께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 같아요. 그들은 의사이기도 했고 교수이기도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캐나다 최고 엘리트들이 목선을 타고 진주만을 거쳐 일본을 거쳐서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그분들은 용정이라는 곳에 닿게 됩니다. 그분들은 그 흑암 속에 있던 우리 조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고 학교가 세워졌고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130년 전 우리 고조 중조 할아버지들에게 그분들이 불러주었던 그 찬양은 유산이 돼서 저희 세대까지 흘러왔고 우리 자녀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우리 손주들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찬송이 유산이 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선교사들을 향해서 명령하셨던 하나님 명령이 이 찬송의 3절 가사에 담겨 있는 데요. 그것은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입니다. 그 아름답고 광활한 캐나다에서 편안하게 인생을 보내려는 게 아니고 은혜를 받았으면 가라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면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왔던 그 선교사들이 불러주었던 이 찬양은 130년 후에 제 찬양이 되었고 150년 200년 후에는 우리 후손들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 영혼이 담겼던 이 찬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윤형주 장로의 여전히 해맑은 소리가 청아한 주의 음성처럼 들렸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큰 박수. 윤형주 장로의 낭랑한 음성이 친구 삼은 회중을 향했다.
 
“저는 찬양 유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중 아멘) 말씀이 물려받은 유산이라면 정말 복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세상적인 것은 물려주려고 애를 쓰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살릴 수 있는 유산은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 찬양입니다. (회중 아멘) 명동촌에서 주일이면 신자들은 다 흰옷을 입고 교회에 갔습니다. 하얗게 빨아 입은 흰옷을 입고 두루마리를 입고 어른들이 명동촌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북간도를 이끈 지도자가 한분 계시는데 그분은 김약연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의 누이동생이 윤동주 시인의 어머니 김용 여사이십니다. 이분이 윤 씨 집안에 시집와 낳은 첫아들이 윤동주입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유언이 뭔지 아세요. ‘내 행동이 곧 유언이다.’ 여러분 이렇게 말하기가 쉽습니까. ‘내 행동이 곧 유언이다.’ 얼마나 자기 행동이 자신 있으면 그것을 자손들에게 유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그 교육 속에서 윤동주는 자랐습니다. 그런데요. 저희 집 가훈이 있는데 뭐냐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오늘날까지 그 가훈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려서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었는가가 그 자녀의 꿈이 됩니다. 어디를 데려 갔는가 무슨 책을 읽게 했는가 무슨 말을 들려주었는가 그것이 그 자녀들의 전공이 되고 미래가 되더군요. 저는 어른들이 부른 찬양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 가족들이 모이면 즐겨 부르는 또 하나의 찬송이 있습니다. (기타로 간주를 했다) 이 찬송은 전도 집회할 때마다 저도 즐겨 부르는 찬양입니다. 주일날 명동교회에서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어른들의 모습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윤동주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 찬송입니다.”
 
그는 왼손 손가락으로 줄을 눌러 음정을 고르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며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트윈폴리오 옛 모습 그대로 맑고 경쾌하게 노래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는 반주하는 기타를 메고 북간도 시절의 찬송을 회상하듯 말했다.
 
“아버지가 즐겨 불렀던 찬양으로 가득 찼을 그 북간도 주일날 명동교회 모습은 참 아름다운 잔치였을 것 같아요.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모여서 찬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말씀을 듣고. 북간도 명동촌은 이미 천국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마을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윤동주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윤동주는 민족시인 투쟁시인 저항시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신앙시인이었습니다. 윤동주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믿었던 시인입니다... (시인 소강석의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을 왼손에 들고)소 목사님은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샅샅이 살피며 윤동주가 보지 못했을 나무의 잎새 흔들림까지 보고 이 시집을 쓰고 펴냈습니다. 이 시집을 보니 윤동주가 이분의 가슴을 들락날락했습니다. 또 이 시집을 쓴 분이 그의 마음속을 들락날락했습니다. 어떻게 윤동주 시와 마음을 이렇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시인들은 착해요. 여러분 그런 시인이 여러분의 목회자인 걸 감사하세요. (회중 박수와 아멘) 소강석 목사님은 시인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여러분의 아픔과 고민을 연민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걸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왜요. 시인의 눈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의 어려움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분은 목회자로서는 다윗의 마음을 지녔고 시인으로서는 윤동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분 덕에 윤동주가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여러분 담임목사님 소강석 시인이 이 자리에 올라오셔서 윤동주를 추모하는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우리 가족을 대표해 소강석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소 목사님의 애정을 통해 믿음의 시인 윤동주가 다시 조명을 받고 사랑받게 된 것을 이 자리에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소강석 목사님이십니다.” (큰 박수)
 
꽃잎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는 유쾌하고 융숭한 목사 소강석 시인이 태풍에 쓸려간 뗏장을 손수 다시 입힌 북간도 윤동주 묘에서 읽은 조시(弔詩)를 다시 슬프게 낭송했다.
 
그 어떤 밤도 흐린 별 하나를 이기지 못하리
(윤동주 묘에서 바치는 뒤늦은 弔詩)
님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고 한줌의 백골이...
 
감히 이 조시대신 윤동주의 추모시로 소강석 시인의 시 가운데 내 마음에 더 애절하고 아련한 “꽃잎과 바람”을 바친다.
 
꽃잎은
바람에 흔들려도
바람을 사랑합니다
꽃잎은
찢기고 허리가 구부러져도
바람을 사랑합니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은 고독의 시간
바람은
꽃잎을 찾아 왔습니다
별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나뭇잎 노래를 들려주고
애틋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밤이 깊어도
아침이 밝아도
꽃잎이 모두 저버려도
꽃잎은
바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떨어집니다
 
시(詩)란 무엇인가.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하는 것(詩言志)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늘인 것(歌永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소강석 시인의 “꽃잎과 바람”은 노래로도 지어져 바리톤 고성현(한양대 교수)이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애창곡 “청산에 살리라”에 이어 소강석 목사의 작시 작곡 “꽃잎과 바람”을 참으로 장중하면서도 애절하게 열창했다.
 
시인이란 무엇일까.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 시인 김수영 '기도' 중에서
 
어느 시인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질의 :시는 뭔가. 정의를 내린다면.
응답 :“아무 것도 아닌 아무 것이다.”
질의 :시인은.
응답 :“글쎄, 힘없는 혁명가?”
 
그에 답해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 이런 시를 남겼다.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육첩방(六疊房)은 짚과 돗자리로 만든 다다미 여섯 장을 깐 일본식 방이다. 이 방에서 윤동주는 시인이란 '현실을 직접 움직이는 나'가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괴로움에 연유해 슬픈 천명(天命)을 받은 힘없는 혁명가임을 깨닫는다.
 
부임한 이래 줄곧 같은 시험문제만 낸다는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그 시험 문제란 바로 ‘시인이란 무엇인가’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위에서 아래로 전해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 사실은 한 번도 어긋난 적도 없었기에 학생들도 모두 그 문제에 대해서만 시험 준비를 했다. 드디어 시험 날 학생들은 교수님께서 정해진 문제를 칠판에 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교수님께서 쓴 첫 글자는 ‘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학생들로 강의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시험 문제는 ‘도대체 시인이란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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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그는 언어의 진정한 연금술사다. 단지 몇 개의 낱말들이 목사인 그의 머리와 가슴을 거치면 언제나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믿음의 세계로 융숭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다. 그 덕분에 시란 그저 영감이 스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가벼운 낭만적 가치관은 흔들리고 다시 흔들리고 또 다시 흔들린다. 그의 시는 내게 신앙의 언어이자 언어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찬물로 세례를 받으면서 먹은 믿음의 첫 마음으로 평생을 산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맞는 첫 성탄절 처음 눈을 맞으며 걷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아팠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을 키운다면. 첫 월급을 받고 첫 헌금을 하던 설레임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며 별을 쳐다보는 목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근근이 별빛을 쳐다보며 나날을 견뎌 왔는데 이제 어쩔 것인가. 내가 너무 쳐다봐 저 별들을 더럽히는 것은 혹 아닐까. 착함과 사랑에 한 걸음 더 나아 가려는 믿음이 아니라면 삶은 대체 무엇을 하자고 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선하고자 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내 따뜻한 저녁밥이 지중해를 표류하다 죽어 간 시리아 난민 소년의 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내 안락한 잠자리가 포탄이 떨어지는 건물 계단에 웅크린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가슴 가득 황홀히 헹구어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이 마음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리. 그걸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해 교회에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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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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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탄생 100주년 시인 소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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