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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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지 않아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적 사람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만나고 싶어 해 

정곡을 찌르는 웃음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보카치오(1313-1375)가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와 건축가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이다. 그는 재치 있는 응수로 사회적 지위의 경계선을 허물고 나폴리 군주와 우정을 맺었다. 어느 찌는 여름날 군주가 조토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라면 그림을 그만 그리겠네.” 
이에 조토가 이렇게 응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폐하라면 말이지요.” 
 
세계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 1888-1955)는 미주리 주 매리빌의 농장 출생이며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에 위치한 중앙 미조리 대학교(University of Central Missouri)를 졸업한 뒤 네브래스카에서 교사, 세일즈맨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12년 YMCA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와 연설 기술을 강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책 또한 그러하다. 그는 그의 저서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에서 말했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론 자신의 일을 전부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 경구에 딱 맞는 유쾌한 목사가 바로 새에덴교회 소강석(蘇康錫, 1962. 2. 22 ~ )이다.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소강석 목사는 전 세계 교인을 사로잡는 설교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스스럼없이 웃게 하는 유쾌한 유머로 시작해 누구나 감동하는 명쾌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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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일 오전 7시 서울 코엑스 D홀에서 열린 제48회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3.000여 명의 국내외 각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함께 참석해 ‘통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민족’이란 주제와 ‘성경적 섬김, 나부터 개혁, 새 마음 국민통합, 경제 재도약, 한반도와 세계 평화’라는 부제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 설교자는 소강석 목사였는데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과 미래의 통일비전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강석 목사의 특기인 즉흥 멘트가 박근혜 대통령을 환하게 웃게 만들었다. 

“세계의 몇몇 유명 여성 정치인들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완전 차별화가 되셨습니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들이지만 대부분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고 튼튼한 거구를 자랑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서의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1963년 8월 중순 무려 25만 명의 사람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 앞에 모였다. 초대장도 없고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던 시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 1. 15. ~ 1968. 4. 4.)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미국에서 가장 연설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인권 탄압으로 고통을 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킹 목사가 다른 인권운동가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며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걸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전파했다. 워싱턴의 여름 뙤약볕 아래 그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흑백 갈등 차원을 넘어 미국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25%의 관중이 백인이었다고 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킹 목사처럼 자신의 신념을 전하는 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본래 영성에 도취된 퓨리티(purity) 지향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무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를 만나  반기독교 세력들의 전략과 공격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알게 되었다. 그 뒤부터 소강석 목사는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맞서 이슬람 세력 억제와 동성애 입법 방지 등을 위한 사상전(思想戰)의 선봉장으로 교계 유니티(unity) 지향의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의 두 축 퓨리티와 유니티를 위해 한국교회를 섬기고 교계 연합을 위한 한 줌의 중보와 불씨가 되고자 헌신하고 있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삶과 설교 앞에 독자는 즐거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앉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어떤 흠이나 결이 없는 가장 유쾌한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순복음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도 아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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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중 소통 매체인 시성(詩性)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2015년 천상병귀천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어느 모자의 초상〉에 이런 시가 있다. 

빈 의자

지하상가 개척교회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하려면 마음이 곤고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팠던 나날들
토요일 저녁이면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드렸던 기도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
그 눈물의 기도 하늘에 닿아 
목자의 피리소리를 따라 몰려오는 양떼들처럼
구름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당신의 목동이 되었으니
아, 지하실 교회 차가운 빈 의자여
어둠 속에서 빛나던 영혼의 별빛이여
고독한 소명자의 눈물이 적신
사랑의 목마름이여

이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순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빈 의자」는 소강석 시인이 가락동의 개척교회 시절 겪은 이야기다. 소강석 목사는 1988년 가락동의 한 상가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정말 피눈물 나는 이야기다. 시인의 말처럼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해야만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들린다. 소강석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 ‘하나님은 꼭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게 된다. 다음은 소강석 목사의 간증 중 일부이다. 

“저는 88년도 가락동에서 월세로 처음 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함께할 개척 멤버나 경제적인 지원 없이 분당으로 옮겨와 그야말로 맨손으로 지금의 새에덴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개척 3년 만에 300명 장년 성도를 돌파하게 되었고 4년 만에 교회 건축 대지 400평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1030평에 달하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으며 1500명 성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지역적인 조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7년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눈물의 기도와 전적인 하나님 은혜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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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4만여 명의 성도가 새에덴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새에덴교회가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이 시에서 보이듯 성도들을 내 부모님이나 형제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내가 발전하고 싶은 것처럼 성도들의 발전을 돕고 그들의 미래와 행복을 같이 고민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의지하여 따랐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본다. 

2016년 8월 14일 새에덴교회에서 광복을 기리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물었다. 

-피곤하신데 사모님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키도 더 크시던데. 
“그건 내가 책 한 권 드릴 게요. 책에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그는 차를 가지고 들어온 사무 간사에게 〈맨발의 소명자〉라는 책을 가져오게 해 건넸다. 

-결혼 이야기가 이 책에 다 있나요.
그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 책에는 그의 장모 정금성 권사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있었다.
광주 신학교 시절 그는 어느 날 무등산 기도원에서 금식 겸 굶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기도하는 곳 위쪽에서 여자 성도 열대여섯이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소리나 모습이 영적 고단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집사님! 저를 위해 기도 좀 해 주십시오. 저는 기도가 고픈 신학생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조용히 보더니 말했다. 
“주의 종이 되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목숨 내놓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요즘 신학생들을 보면 한숨 나올 때가 많아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기도를 했다. 순간 자손심이 상한 그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쌀쌀 맞을 수가 있을까.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저 사람은 영통을 한게 아니라 먹통을 했구먼.’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했다.
“주여! 나를 저런 사람보다 7배 70배 더 큰 기도의 영력을 주옵소서.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지금 이 기도에는 억울함이 배어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진(眞)보다도 선(善), 인간의 행복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라는 것은 자주 지적된다. 그의 저서 라틴어 제목 〈에티카〉(윤리학')가 가리키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는 시도(試圖)이다. 그래서 ‘감정의 윤리학자’로 불린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한 인간의 48가지나 되는 감정엔 ‘억울함’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한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억울함을 느끼나. 교통사고가 나도 갑자기 상사에게 혼이 나도 심지어 말싸움을 하다 이겨도 어딘가 손해 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은 억울함을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서양인은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았다는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강석 전도사도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억울해서 씩씩거리며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 보니 아까 그분이었다. 아까는 쌀쌀 맞았는데 지금은 부드럽게 그를 대하니 그는 어리둥절했다. 
“기도하시는 데 실례합니다만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있는 데 말을 걸어 그만 무심코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시는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광주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기회만 있으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기도하며 이상을 키웠다. 
“저 넓은 서울 땅!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느 쪽으로 인도하실까. 어느 쪽에서 개척을 하게 하실까.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하나님! 저도 동서남북을 바라봅니다. 저의 갈 길을 보여주소서. 제가 가야 할 곳을 가르쳐주소서. 그리고 개척에 필요한 물질도 예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이런 기도의 영감 속에 취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당시 유쾌한 전도사 소강석에게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영등포로 갈까요, 청량리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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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개척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그는 데이트 한번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신앙생활에 너무 바쁘고 또 전남 화순군 백암리에서 개척한 백암교회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는 연애할 기회가 없었다. 그때까지 여자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고 게다가 그것이 죄인 줄 알았다. 그는 이제는 데이트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회 개척을 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많은 목사님들의 조언도 뒤따랐다. 총각 신분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왕에 결혼을 할 거라면 개척 전에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결혼할 대상자는 있는데 그 자매가 그하고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안 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기도원에서 만나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의 딸인데,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목사 사모는 절대로 안 하겠으며, 특히 소강석 전도사 같은 사람과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대로 마음까지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자매가 저에게 그토록 거부반응을 보인 이유는 어렸을 때 자기 어머니가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믿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닭을 잡아도 자녀들에게는 국물도 맛보이지 않고 목사님께 갖다드리고,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해도 교회에 먼저 갖다 바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앞장서서 교회 건축헌금을 드렸다는 것이다. 가난한 목사님과 어려운 교회는 보이는 대로 도와주면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는 거의 신경을 못 썼단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목사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절대로 엄마처럼 믿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엄마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 열성파 예수쟁이 전도사와 결혼을 하라니 펄펄 뛰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키도 작고 못생기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남자니...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키 작은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제가 키가 작고 못났으며 가난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편지를 써도 뜯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습니다. 편지를 아무리 잘 써도 한 자도 안 읽어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녀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종합병원 옆 다방에서 7시에 기다리겠다고 편지하고 나가면 8시, 9시가 되도록 어항 옆에 앉아 물고기만 바라보다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직접 찾아가면 욕세례를 퍼부으며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맞받아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욕을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저와 죽어도 결혼을 안 하기 위한 쇼였습니다.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면 포기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녀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애 경험이 없는 저는 데이트도 믿음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밀어붙이니까 그녀가 이제는 해외근무 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귀찮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아예 해외로 도망을 가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장모님이 되실 정금성 권사님께 무작정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딸이 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저렇게 결혼 하지 않겠다고 날고뛰니 나라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차라리 거시기 해 불소.” 
“예? 거시기라고요?” 
“내가 방 열쇠를 줄 테니까 거시기 해 블란 말이시...” 
“아, 네... 거시기요...” 

저는 그제야 거시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열쇠를 받아 장모님의 뜻을 받들어 거시기(?)를 하기 위해 밤에 그녀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따고 들어가자마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물건들이 날아 왔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며 발버둥을 치던지 거시기는 고사하고 본전도 못 챙기고 도망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주일을 작정 기도하면서 전략을 세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충분한 자금을 신청했습니다. 그것을 일주일 내에 주시면 제 전략이 먹혀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3일 만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도 미국에 계시던 박종삼 목사님으로부터 돈이 송금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돈을 송금하면 며칠 이상이 걸리는데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를 해 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일주일 후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근무하는 적십자병원 앞에 저는 뭉칫돈(?)을 주고 택시 한 대를 대기시켜 놓고 잠복근무를 하였습니다. 물론 이 전락은 그녀의 어머니 정 권사님과 짜낸 지혜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잠복근무를 시작한 지 정확히 33분 후 병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왔습니다. 그중에 권사님의 딸인 배정숙 자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기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지... 

저는 그들을 계속 미행하였습니다. 물론 제 뒤로 멀찌감치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적십자병원에서 충정로 쪽으로 가던 중 한 여자가 전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약속이나 모임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머리 모양도 특별히 신경을 쓴 데다 양복에 구두까지 맞춰 잘 차려입은 저는 배정숙 자매 앞으로 가서 입을 열었습니다.
“정숙 씨! 어떻게 된 겁니까? 나하고 1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지금 2시가 되었는데, 어디 가는 거예요? 미스 배가 먼저 나에게 만나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간호과장과 수간호사가 있는 곳에서 평소처럼 제게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으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때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습니다. 그 순간 대기시켜 놓은 택시가 제 앞에 와서 섰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엄중한 자세로 그녀를 택시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부터 제 일방적인 태도에 압도당했는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침이 마르고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품위 있는 모습을 지키며 여유 있는 체했습니다. 택시는 내장산으로 달렸습니다. 택시 안에서 침묵은 계속되었고 저는 다소곳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벌어진 것입니다.
드디어 내장산에 도착했습니다. 금방 눈에 띄는 벤치로 가서 나란히 앉았습니다.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습니다. 한 1분쯤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리 꾸며진 거룩한 각본대로 일어나 정숙 씨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버렸습니다.

“주여! 주의 종이 사랑하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딸에게 도장 찍어주소서. 결재하여주소서. 목사 사모로 이미 인을 쳐주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소명이 확실한 저 같은 목사 후보생 사모로 도장 찍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내 평생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안수기도를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배정숙 자매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하기도 어색해져서 더 이상 내장산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바로 차를 타고 다시 광주로 왔습니다. 광주로 오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주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여! 연애하는 데도 뜨거운 소명감이 필요하고 우직한 믿음이 필요하군요. 이제 저의 개척도 절반은 이루어졌네요.”

저는 그 당시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이나 지혜로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앞장세우고 영적 생명력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목회를 합니다. 돌아오자마자 저는 결혼 날짜부터 잡았습니다. 12월 26일! 딱 50일을 앞두고 결혼 날짜를 정한 셈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쪽 집에서 펄쩍 뛰었습니다. 방 얻을 돈도 준비해놓지 않은 데다 언제 준비해서 결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하며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때마다 항상 정 권사님은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평소에 존경하던 김창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신부는 빌려서라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저는 헌 양복을 입었고, 길거리 리어카에서 산 1500원짜리 모조 반지가 결혼 예물의 전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특별한 사연이 담긴 우리의 결혼 예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선생(?)께서 특별 심방을 와 가져가버렸기 때문입니다. 1500원짜리 모조 반지라는 것도 모르고 그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요.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6년 소강석 목사는 신학교 전 과정을 수박과 오이를 팔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소명의 길을 밟은 뒤 목사안수를 받으면 비전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란 기대는 몽상이었다, 소 목사는 부교역자로 받아주는 교회 하나 없는 척박한 현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는 하나님의 비전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야 했다. 서울에서 개척한다는 믿음을 갖고 물색한 지역은 그마나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개척을 할 수 있는 ‘가락동’일대였다. 1,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48만원. 지하 23평 공간에서 소강석 목사는 첫 예배를 시작했다. 

주일 낮 예배는 몇몇 주민들의 참석이 있었지만 저녁예배는 장모님과 부인 그리고 어린 자녀들만 참석해 힘겨웠다. 그나마 부인은 어린 자녀 뒤치다꺼리 하느라 뒤편에 있어서 장모님과 마주 대하는 설교시간은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하곤 한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오가는 쥐새끼들 때문에 경건해야 할 예배는 어수선 그 자체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신의 삶을 기억하며 낮에는 전도하면서 밤에는 교회당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작정기도 100일 작전’에 돌입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가 비로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새롭게 각성했던 시기였다. 더 많은 신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하기를 수 백회, 소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다.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

1988년 11월 가락동 지하에서 처음 예배를 시작한 이후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비좁은 공간 속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질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소강석 목사는 2001년 3월 평양을 방문할 기회를 통해 통일한국 시대의 비전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평양에 있는 창광 유치원을 방문하면서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한 인재 양성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북한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창광 유치원에서부터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에서 교회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훈련시켜 통일 한국 시대를 짊어지고 갈 지도자로 배출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그 결과 3M(맨손, 맨몸, 맨땅)으로 시작된 새에덴교회의 역사는 창립 17년 만인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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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7일 약속보다 반시간 늦은 오후 2시 30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도착한 새에덴교회 집무실에서 소강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늦는 바람에 점심을 여유 있게 먹었다고 웃으며 예의 그 달변의 입을 먼저 열었다. 

-목장 기도회 때 제 설교 들으셨나요.
“광명교회에서 못 들었습니다.”

-뭐냐면 지금 한국 교회가 빨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회 생태계 교회 생태계 환경을 지키고 복원하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 관심이 있느냐. 생태계가 무너지면 우리 생존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사막화 되고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생태계가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걸 모르니까 교단 안에서 분쟁이 잦은 겁니다. 이거 아는 사람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요. 이건 내가 국정원장을 지내신 김승규 장로에게서 배웠습니다. 
“명성교회 장로죠.”

-네 아닙니다. 할렐루야 교회 장로죠. 그분한테 배워가지고 또 따로 전문가들한테도 배웠습니다. 제가 얘기 좀 쭉 하겠습니다. (인쇄물을 보이며) 여기 있지만 글과 말은 또 다릅니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소강석 목사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영국교회는 사상전과 영전을 하지 못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부흥 운동과 선교 운동을 주도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국에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입법화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국교회는 입법화로 가기 전에 사상전과 영전을 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교회는 이런 시대적 트렌드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알고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를 막아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영국교회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노터치하겠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개교회의 목양을 하는 데만 집중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년, 40년 후에는 영국교회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겨우 2% 밖에 안 되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반대로 이슬람은 8%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테러문제로 몸살을 앓고 두려워 떨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도 사상전을 하고 영전을 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세 가지 당면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 생태계와 교회 환경을 복원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의 터보 엔진을 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목회 생태계가 복원되어도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 부흥하지 않으면 안 돼요. 

셋째,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신앙을 계승해주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교회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목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생태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기후변화협약까지 하며 자연 생태계 복원을 위해 목매고 있습니까? 환경, 생태계가 파괴되면 우리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생명 사회가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 최고의 천재 관상가 김내경이 어느 바닷가에서 한명회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이거늘,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관상만 보았지, 보이지 않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 한국교회도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어요. 다시 말하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왜 불어오는가, 그런 파도를 일으키는 원인인 바람을 볼 수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걸 보고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고 연합하여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어야 해요.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이러한 사상전, 영전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다 개교회 목회와 개교단 위주의 각개전투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아니, 한국교회는 다툼과 분열의 블랙홀에 빠지게 된 거예요. 개교회도 계속 서로 내부 파워게임을 하는 교회가 많았고 교계가 교권 싸움으로 연속을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할 수 있습니까? 

1)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저도 가락동 23평 지하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지하실에서 개척해서 죽어라고 전도하여 양육해 놓으면 주변에 깨끗하고 시설 좋은 교회로 가 버리는 거예요. 저도 과거에 이런 아픔을 겪어 보았어요. 목회생태계가 살아 있을 때는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사람이 옮겨도 또 다시 새로운 성도들이 왔지만, 지금은 더 이상 작은 교회에 교인들이 오지 않아요. 왜냐면 이런 수평이동의 선순환 생태계가 다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로칼 처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공교회로 존재해야 해요. 우리 지역에도 공교회가 이루어져야 하고 교단 안에서도, 한국교회 안에서도 공교회를 이루어야 해요. 선교신학자 랄프 네이버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은 교회가 성장할수록 자신만의 성을 쌓으려고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 지역 안에 하나님의 도성을 쌓아야 한다고 권면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캐슬 빌더(castle builder)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킹덤 빌더(kingdom builder)가 되라고 하는 거예요. 

2) 신앙과 신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purity)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퓨리티의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전략 중의 하나가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을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언약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정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가르침대로 정결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거룩(holiness)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순결(purity)이나 정결(cleaness)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이지만 거룩에 참여하고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정결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정결한 영성, 순결한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더렵혀진 신부가 어떻게 신랑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정결,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없어요. 

일제시대 때도 얼마나 신사참배 문제나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더럽혔습니까? 영적 간음을 하게 된 것이에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종교인들까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적 행위라고 변명하며 신사참배에 동참했어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아녀자에게 정절의 의무가 있듯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정절이 있어야 한다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어요.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폭압으로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마저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아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세상의 명예와 권력 앞에 믿음의 정절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며 통회합니다. 그리고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외치며 순교의 길을 가다가 결국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옥중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교회가 지원을 해서 일사각오라는 영화로 제작이 되어 상영이 되었어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주 목사님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산정현교회를 생각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오늘날 우리의 잘못으로 목회 생태계가 깨져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서로 연합하여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교회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뿐만 아니라 안티크리스천의 공격이 얼마나 주도적이고 전략적으로 공격해 오는지 몰라요. 물론 이런 일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핍박과 박해로 무너뜨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주 보이지 않게 사상전 영전으로 공격해 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상의 기본은 신마르크스주의입니다. 신마르크스주의(Neo Marxism)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만든 것인데 한마디로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휴머니즘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상입니다. 

내용은 무신론이지만 겉으로는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의 권익보호, 공동체 등을 추구합니다. 바로 이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진보 사상과 신좌파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 권익보호 공동체 등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무신론적 사상이 끼어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성도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동성애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동성애를 통한 성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신마르크스주의를 창안한 빌헬름 라이히가 근로자들의 정신치료를 해주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었는데, 좁은 국민주택에서 사는 노동자들이 신경증이나 노이로제에 많이 걸려있더라는 거예요. 그 이유를 분석해보더니 성적인 억압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작은 집에서 부모님도 모시고 애들도 우글우글하지요,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원만한 성생활을 못해 성적 억압이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 때 그는 깨달았어요. “아, 이것이다. 사람은 성적 욕구를 잘 풀어줘야 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성적 욕구를 발산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정치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인간에겐 성적인 억압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다. 제한받고 있는 성적문제부터 해방시켜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주장한 성정치 이론이었습니다. 성정치 이론에 의하면 억압된 성적 욕구는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적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의 성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자유롭게 분출할 때 개인도 행복하고 이 세상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세상을 맞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합니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남자끼리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여자끼리도 마음만 맞으면 얼마든지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거지요. 따라서 신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공격 목표는 기존 제도권의 가정과 학교에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가정과 학교를 무너뜨리려고 해요. 그리고 교회를 공격해요. 특별히 대형교회를 공격해요. 그래서 이러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 교육부터 공격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의 규범과 구조에서 해방을 하도록 충동하고 선동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자체에서는 어떻게든지 학생들의 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안절부절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거든요. 이것이 바로 성정치와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래도 그 사람들 불쌍하니까 그냥 자기들 맘대로 살도록 놔두면 안 됩니까.” 
물론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그들이 소수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들 좋은 대로 살면 누가 뭐라 하겠어요. 동성애자들을 보호한다고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다수의 인권이 역차별을 받게 되거든요. 특별히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못해요. 이런 설교 했다간 당장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게 돼요. 그러면 목회 생태계가 저절로 파괴될 수밖에요. 또 어떤 분은 우리나라에 동성애자들이 몇 명이나 되고 영향력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느냐고 생각할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동성애를 연구를 하다 보니까 동성애가 이슬람이나 이단, 안티 세력과도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이 세력이 엄청나게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해 말하려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슬람은 절대로 기독교를 용납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러한 세력이 안티크리스천들과 연합을 해서 한국교회를 전략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는 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런 교회라면 함께 연대해서 이슬람을 막아내고 동성애를 막아내고 이단을 막아내야 해요. 그렇게 해서 목회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필요해요. 물론 이 일이 어려운 일이기도는 합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퓨리티(purity)와 유니티(unity)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까 내부의 소모전을 하다가 공멸의 나락으로 추락했던 거예요...

물론 우리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암묵적으로 교회 간의 경쟁, 교단 간의 경쟁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미국도 보십시오.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도 빌리 그래함 이후에 연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없으니까 다 개교회주의로 빠져 버렸어요. 개교회, 개교단주의에 빠지고 큰 교회 목사들 간에 스타플레이를 하다 보니까 세상에 동성결혼법이 통과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여러분은 〈신은 죽지 않았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세상에 수업시간에 교사가 예수님 이야기를 했다고 고소를 당해 법정까지 서게 돼요. 미국도 이런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 연합집회를 갔을 때 동성결혼법이 통과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집회를 했던 교회에 7천 만이나 되는 큰 교단을 이끄는 총회장이 참석을 한 거예요.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성도들을 이끄는 총회장이에요. 그래서 그날도 총회장 전용기를 타고 올 정도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인사말을 하는데 자기는 변호사 출신이라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것에 대해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성명서를 냈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을 듣고 하도 열이 받아서 강단에 올라가 예정에 없었던 동성애 설교를 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태어나서 이런 설교는 처음 들어본다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와 동행했던 기자들이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미국 교회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몇몇 교회들을 탐방하고 왔는데, 한 군데도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주보 광고나 반대 설교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그 총회장님께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총회장님, 성도가 7천만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함께 연합해서 동성결혼법을 막아야지요. 만약에 워싱턴 광장에서 미국 교회 성도들이 백만 명만 모여서 반대 집회를 했다면 절대로 동성결혼법은 통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총회장도 내 말이 맞다는 거예요...

영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966년 런던목회자협의회에서 존 스타트목사가 로이드 존스 목사를 강사로 세웠어요.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가 너무 독선적 강의를 한 거예요. 그러자 그 후로 존 스타트 목사가 로이드 존스와 결별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영국교회가 갈라지면서 힘을 잃고 사회적 정치적 이슈나 현안에 대해서 전혀 노터치를 한 거예요.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개교회 목회만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영국교회도 망한 것이 아닙니까? 

장자교단이라면 이런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학과 교리가 다르면 큰 형님이 야단도 치고 가르치면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면서라도,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너네들은 우리와 다르니까 니들끼리만 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옛날에도 종갓집이 종갓집 역할을 잘해야 집안이 잘 되었어요. 장손이 장손 역할을 잘 해야지 무능하고 역할을 못하면 못난 동생 놈들이 육갑을 떠는 경우가 있어요. 동생들이 육갑을 떨면 집안이 자칫 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를 지키면서 함께 연대해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야 해요. 그러려면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해요. 그리고 때로는 정책적 연합을 해야 해요. 우리 교단이 좀 영향력도 발휘하고 기수가 되어야 해요. 저는 이러한 일을 10여 년 전부터 해 왔어요. 10여 년 전부터 동성애를 막기 시작했고 8-9년 전부터 이슬람을 막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일을 하면서 테러 위협도 받았어요. 심지어는 어느 국가 기관에서 테러를 대비해서 신변보호를 해 준 적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목회 생태계를 복원한다고 언론 대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만나려고 국회를 들락날락했어요. 모든 제도와 문화는 사상과 철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철학은 반드시 입법화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국회를 들락날락하며 동성애법을 막고 작년에는 교회 과세 문제를 은밀하게 막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저 보고 정치목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교회 생태계를 보호하고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세력의 공격을 막는다는데, 누가 정치 목사라고 하겠습니까?

이 모든 일이 목회 생태계와 관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목회 생태계를 지키는 일을 해야죠. 우리 교단이 자기 왕국을 세우는 캐슬 빌더가 아니라 킹덤 빌더가 되어 한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생태계를 복원하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1시간 40분에 걸친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나만을 위한 열정적인 일인(一人) 특강이 끝났다. 오후 5시 그는 수요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는 3층 당회장실에서 교회 밖 건널목까지 배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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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4일 광복을 기리는 예배를 드린 뒤 교회를 방문한 문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 뒤 간신히 짬을 내 만났다. 피곤해 한숨을 쉬는 소강석 목사는 내가 물을 두 가지가 뭐냐고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는 생략하고 앞으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정말 건강관리가 제 숙제입니다. 건강에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게 제일 중요하더군요. 내가 해 보니까. 그래서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말입니다. 나는 골프도 못 치고 다른 특별한 운동도 못 합니다. 뒷산이 있어요. 뒷산 가서 장로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교합니다. 때로는 혼자라도 밤에 산에 가서 명상하는 그것이 아직까지 버티게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제 과제는 휴식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가 무리이신 것 같은데요. 
“아! 휴식. 지금 사실은 월요일은 뮤지컬도 가야하고 그리고 모임들 8·15 행사...”

-주보에 나온 목사님 일정만 봐도 숨이 막히던데요. 
“또 동성애 모임 뭐라더라 아 그 지난번에 집회한 것에 대한 뒷관리...”

-저는 예배드리고 뵈면서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 얼마나 가시겠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지도자이신데 지쳐 계시고. 메시지에서도 강단 위에서도 너무 안타깝고...
“아휴.”

-목사님 설교를 세계 사람들이 보는데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보이면... 설교 횟수를 좀 줄이셔야겠어요. 주일 설교를 두 번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부목사들도 많던데(32명).
“부교역자들이 많이 있지만 설교는 은사가 있어야 됩니다.”

-물론 은사가 있어야 되죠. 그래도 소 목사님이 줄이시면 참석 교인이 두 배로 늘어날 겁니다. 세 번 나눠 참석하던 교인들이 두 번에 다 모여들 겁니다. 한 번이라도 쉬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1부는 중직자들이 참여해요. 세 번 해도 아무 문제없어요. 김삼환 목사도 세 번 해요. 일단은 제가 4부하고 5부는 영상예배로 드리고 축도해요. 저녁예배 때는 여섯 번 하게 되니까 정말 죽어요. 저번 수요일 오셨던가요. 그때는 여덟 번 설교했어요.”

-사람들이 말하듯이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앞을 바라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좀 드려야겠다 싶어 그냥 가려다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지도자는 가급적 시간과 건강을 아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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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1일 오후 8시 70을 바라보는 김문기 장로가 르디님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수요예배 설교 중 소강석 목사는 말했다.

“참 옛날에 점쟁이가 예언을 하는데 큰 아들은 관운이 많고 그렇게 만사형통을 한다는데 나는 빌어먹게 생겼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하나님한테 빌어먹고 살고 있어요.” (양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한다. 회중 박장대소.) 

세상에 소강석처럼 유쾌한 목사는 없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숨을 참고, 손을 가지런히 하고,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따위의 존재론적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왜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다. 그러나 유쾌한 목사 소강석이 3M 목회 과정에서 자신의 벽 앞에서 취한 믿음의 자세는 내가 보기에 사뮈엘 베케트의 장편소설〈이름 붙일 수 없는 자〉중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는 주인공이 몸통과 머리만 남은 채 단지에 들어가 어느 식당의 메뉴판 노릇을 하면서 말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위대한 정신은 늘 임계점(臨界點) 가까이에서 그 너머를 꿈꾼다. 사상이 한 경계를 넘을 때 세계가 발전한다. 그래서 세상엔 아직도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남아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와 대다수의 실망스러운 리더가 존재한다. 늘 그래왔고, 또 늘 그럴 것이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그를 즐겨 만나고 싶어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 그가 교단 지도자 되어 우리를 유쾌하게 해 주고 우리 믿음을 명쾌하게 해 주기를 소망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명기 3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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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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