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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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회 총회장 찬송가공회 이사장
총회와 오랜 소송을 벌인 황승기
이제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
자신의 후임 류명렬 목사를 세워
 
대전남부교회 제6대 위임목사 류명렬
성경적 설교와 인품으로 그 목양지를
배가시키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여
 
그는 총회도 섬겨 발전시킬
섬김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겐 하늘이다. 우리는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새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 보면 내 마음은 금시로 따스해 온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하고 불러 보면 "오냐"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 참말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름. 바위도 오래 되면 깎이는데 변함없는 해와 달보다 더 오랠 하나님 아버지 이름.
 
2008년 10월 21일 황승기 목사(제90회 총회 총회장) 뒤를 이어 류명렬 목사가 1953년 9월 설립된 대전남부교회 제6대 위임목사로 취임했다. 이 날 원로장로가 된 임해순 장로와 함께 황승기 목사는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1973년 제58회 총회 총회장이고 아직도 살아계신 박요한 목사가 대전남부교회 제4대 위임목사다.
 
1991년 8월 4일 전도사로 대전남부교회에 부임해 위임목사가 된 류명렬 목사가 2016년 2월 28일 오전 11시 회중이 배가되어 가득한 본당 설교단에 섰다. 설교 본문 신명기 5장 11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제목 ‘주문과 거룩하신 이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제3계명이라고 하는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했습니다. 앞의 말씀이 명령이었다면 이어서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은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을 죄가 없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계명이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보다 지키기가 쉬운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생활 가운데서 자주 범하는 계명이 이 세 번째 계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것을 가리킵니까. 오늘 이 시간 그것을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만 잘못 부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격적인 존재는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름이 있고 저도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으십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뜻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이 여호와의 이름만 보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호칭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그 어떤 존재나 대상을 대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이름만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망령되게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죠. 우리는 그것을 주기도라고 합니다. 주기도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뜻은 단지 여호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 즉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 말씀에 베드로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구원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예수 예수 예수만 하면 구원받느냐 그 말이 아니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뜻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그 예수님을 대리하는 호칭인 예수여 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회중 아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은 단지 이름만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정리할 것은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망령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웨입니다. 이 말이 구약에서 분명하게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거짓되다 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신명기 5장 20절에 ‘증거하지 말찌니라’ 제9계명이 나옵니다. 이 거짓이라는 말이 망령되다는 말과 동일한 샤웨입니다. 그러니까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은 거짓되게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즉 진실하지 않게 부르는 것이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의 마당만 밟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수많은 제물을 가져온들 수양 수송아지 기름과 피와 고기를 드려 내가 배부른데 언제 이런 것들을 가져 오라 했느냐. 소용없다. 이런 행위는 너희가 다만 성전의 마당만 밟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후 13절에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 여기서 헛된 이라는 말이 망령되이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은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생활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모습은 없을까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 맹세 거짓 약속을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나 주장을 확실한 것으로 보이고 또 만들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함께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없는 약속이고 지켜질 가능성이 희박한 약속인데 마치 틀림없이 될 것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서 약속을 하는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 거짓된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여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 하늘에 두고 맹세하는데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등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회중 아멘.)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거짓과 함께하실 수도 없습니다. 거짓은 마귀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이 마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거짓 약속과 거짓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4절 중요한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여러분 무서운 말씀입니다. 너희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인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 종교 집단에서 이런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들이 누구인지는 설교 말미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이 사람들은 교인들을 자기 교파의 교인들로 만들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릅니다. 구체적인 예는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만난 그 사람은 요즈음 보기 드물게 영적이고 신령하고 신실한 사람입니다. 대부분 목사이거나 선교사입니다. 아니면 사역을 하다가 지금 잠간 접어두고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신실한 전도사이거나 기도 많이 하는 권사입니다. 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이 사람이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나 우리 목사님이 내게 쉽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 문제들을 내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인도가 너무 정확하고 확실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정말 이런 신실한 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자고 여러분을 어떤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난 그 사람은 영적인 목사도 선교사도 전도사도 권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보냈느냐. 그들은 나의 정보를 내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이미 다 전달을 받고 그들의 보냄을 받은 연기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남 집사님이 옆의 조 집사님을 통해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한테 너무 잘 해주고 잘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녀. 남 집사님의 정보를 조 집사님이 다 알아서 교회 밖의 사람에게 알려준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겁니다. 어떤 상황이냐. 여러분 주변에 우리 대전남부교회 교인으로 위장해서 들어온 일명 추수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 상황도 살피고 교인 상황도 다 파악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포섭할 대상을 찍어요. 저 집사님은 이런 문제도 요 집사님은 저런 문제도 있구나 하는 것을 파악하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접근하면 낚이겠구나 하는 판단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미래 기도 제목은 어떤 것인지 하는 데이터와 정보를 내가 신실하다고 믿고 만난 사람에게 다 전달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합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나를 찾아왔던 그 집사님이 어느 날 영화관 앞이나 커피숍에서 둘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을 만나고 나한테 소개시켜 줍니다. 그래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참 지난 뒤 전화가 옵니다. 어떤 전화이냐 하면 내가 기도하는 중에 당신이 계속 생각이 납디다. 하나님이 나에게 형제에 대한 마음을 계속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난 뒤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내가 도움을 드리고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여러분 표면적으로 보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이용하는 종교적인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혹하면 여러분은 그들의 낚싯줄에 걸려든 겁니다. 이제부터 그 사람은 아카데미 주연상을 탈 기세로 연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안내해 데려가는 데가 있습니다. 그곳은 복음방입니다. 그곳에서는 성경의 비유를 가르칩니다. 씨 뿌리는 비유 등을 가르치면서 슬쩍 한마디 던집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죠. 이 비판에 반응을 보이면 점차적으로 수위를 높여 갑니다. 결론이 어디까지 이르냐하면 교회에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동의하면 교회 비판은 중단됩니다. 여러분 이 복음방이라는 곳은 그들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학습하고 세뇌시키는 장소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이유는 우리 교회에 추수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자꾸 어떤 만남을 가장해 신령한 목사님을 만나게 해 가라지니 씨 뿌리는 것이니 하는 여러 비유를 듣게 합니다. 그런데 저희 믿음의 교육과는 영 틀려서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만희를 교주로 하는 신천지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거짓말하고 이 거짓을 정당화합니다. 성경에 마귀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거짓을 행하면서도 이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기 위한 전략이고 정당한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이 신천지의 거짓말은 의를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화시킨 것입니다. 이만희를 예수님과 동일한 메시아로 만들고 교회에는 구원이 없고 이만희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변에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믿지 마십시오. 정말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티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들이 신령한 티를 냅니다.
 
두 번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믿음 없이 미신적이고 마술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올바른 행위로 인정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 중에 있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고난 가운데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 탄식처럼 주여! 불렀다면 주의 이름을 부른 이 외마디는 주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라 의미 없이 함부로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마치 주의 이름이 어떤 마술을 행하는 주문인 것처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도박이나 범죄 행위가 드러났을 때 어떤 사람들이 주여! 읊조리는 것 같은 행위 말입니다. 이런 행위가 믿음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를 예전에 하신 분들은 회개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금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수리수리마하수리’ 정도의 주문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런 의미 없이 생각도 없이 주문처럼 주여! 주여!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여! 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여 주여 주여 했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은 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주문으로 외는 기독교 무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점치고 그것을 알려준다는 미신 행위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모든 것에다 여호와의 이름을 갖다 붙이면 그게 믿음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닌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듯 포장해서 말합니다.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마음 이런 생각을 주셨다’ 떠벌립니다. 솔직하게 자기 생각인데 하고 말해야지 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을 신학 용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나타내시는 방법을 성경에서 보면 때로는 구름으로 때로는 불로 때로는 음성으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꿈으로 하십니다. 어떤 때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꿈과 환상을 보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기도원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과 환상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 즉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는 성경입니다. 꿈과 환상이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의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꿈과 환상을 자기 마음대로 가공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지 않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지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어요.
 
역대하 18장에 보면 남 이스라엘과 북 유다가 연합군을 만들어 동편에 있는 길르앗 라못이라는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사람 여호사밧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400명을 불렀습니다. 그때 제일 잘 나가는 선지자가 누구였습니까. 시드기야였습니다. 역대하 18장 10절에 보면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다른 선지자들도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예언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철로 뿔을 만들어 여호와께서 이 뿔로 저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시청각 교재를 만들어 자기의 예언이 확실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거짓 선지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언이 안 맞았습니다. 전쟁에서 남쪽 이스라엘과 북쪽 유다가 대패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전사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습니다.
 
여러분 가장 정확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회중 아멘)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가정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 주겠다 붙들어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약속하셨으면 믿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 말씀으로 만족을 못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기도원에 가서 신령한 소리를 듣고 싶고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 싶어 하는 이게 뭡니까. 불신앙의 행동 아닙니까. 교회 목사님들은 별로 신령하지 못해서 기도원에 가서 신령한 사람 말을 들어야 속이 좀 시원해지지 하는 겁니다. 어느 게 신앙적인 자세입니까. 말씀을 붙잡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에 만족을 못하니까 신령한 소리 듣고 미래에 대한 점을 치는 게 옳은 겁니까. 지금 성경에 있는 문자는 죽은 것이고 기도원의 신령한 분들의 말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까. 그게 바른 믿음입니까. 그런데도 여러분 기도원 가지 않습니까. 제가 기도원 가는 거 막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쳐 복종시키고 하나님 말씀 붙들고 기도한다면 기도원 가는 거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원 가세요. 뭔가 마음이 컬컬해서 점치는 것처럼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면 기도원 백번 가도 소용없습니다.
 
옛날 경건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는 글자만 나와도 여호와라고 읽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이름을 그냥 부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자식이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아버지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듣고 홍길동입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예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성함을 물으면 반드시 홍 길 자 동 자이십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버지 이름만 해도 우리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쓰고 아도나이라고 읽은 것입니다. 너무 거룩하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서기관들은 오늘날처럼 성경을 출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점 넷을 찍어 놓고 붓을 논 다음 목욕을 했습니다. 서기관은 자신을 정결하게 한 다음 그때 다시 여호와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시편 99편 3절에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41편 3졀에 보니까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라고 했습니다. 함부로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활 전반에 미치는 말씀입니다. 나의 행동이 로마서 2장 24절의 ‘너희 행위로 인하여 내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을 받는구나’ 하는 말씀에 적용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부르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경솔하게 마치 주문처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아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으로 주의 영광을 보면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렇듯 류명렬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대전남부교회의 생존한 두 원로 목사 박요한 목사와 황승기 목사를 섬기고 있듯 그 노회와 우리 총회도 섬기리라.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제90회 총회 총회장을 지내고 찬송가공회 이사장을 지내며 총회와 오랜 소송을 벌인 황승기가 이제까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후임으로 2008년 10월 21일 류명렬 목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대전남부교회 제6대 위임목사 류명렬은 성경적 설교와 인품으로 그 목양지를 배가시키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였다. 그렇듯 그는 총회도 섬겨 발전시키는 섬김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201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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