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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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는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더 나아가 매 순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피카데리(Picardy) 지방 노용(Noyo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 칼빈(Gerard Calvin)은 부모가 경영하는 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도제 교육을 받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후에는 시청 서기와 교구의 서기 임무를 거쳐 교구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가 됨으로써 귀족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잔느(Jeanne Le Franc)도 음식점을 경영했던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로서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칼빈은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셰 대학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칼빈은 다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는데, 몽테규 대학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6시 아침 미사를 드릴 때까지 2시간 강의, 미사 후에는 아침 식사, 그리고 8-10시까지는 오전 강의, 그리고 1시간 동안 토론, 11시에 점심 식사(점심시간에는 성경이나 위인전기가 읽혀지고 기도하고 대학 내의 광고 사항을 알려줌), 12시에는 오전을 반성하고, 1-3시까지는 일반 독서시간과 자유시간, 3-5시 다시 오후 강의, 5시에 저녁 식사, 그리고 기도회를 가진 후, 다시 오후 강의에 대한 토론을 하고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 취침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고 꽉 짜인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는 5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살의 칼빈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로는 흔히 칼빈의 아버지가 재정문제로 교회 참사회와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칼빈의 자서전적인 시편 주석의 서론을 보면, 법조계로 나가는 것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532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자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었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에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한다.

1533년경에 칼빈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성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해져 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열심히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 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다. 

1533년 11월 1일에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콥의 취임 연설의 원고를 칼빈이 작성하게 되는데,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의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파리 남서부 400km에 위치한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 집에는 약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세상 편하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 강요’라는 대저작의 체계를 세웠다.

1534년 스물다섯의 칼빈은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해 10월 개신교인들에 대해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었고, 개신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칼빈도 결국 망명자가 되어 고국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빈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빈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1534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프랑스 사람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칼빈은 참으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칼빈의 저술이나 설교에 대해 트집 잡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대파들의 공갈과 협박은 끊일 새가 없었고, 주민들 중에는 자기 개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혐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죽음을 동경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미사 대신 예배를 갱신해 나갔으며, 어른은 물론 어린이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어린이에게 신앙의 핵심인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27세인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한 2년 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바젤로 갔다.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빈은 마침내 부서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설립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죽자 1540년 8월 6일에 칼빈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1542년 7월 28일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자끄(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칼빈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주제별로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의 탁월한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를 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저술로 칼빈은 종교개혁시대의 유일한 신학자로 꼽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틴 루터가 행동을 통해 종교개혁을 실천해 나갔다면, 칼빈은 개혁신학을 통해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개혁자였다. ‘기독교강요’를 비롯, 그의 탁월한 저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종교개혁은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고, 시대를 초월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개혁교회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을 위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의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비롯된 말이다.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칼빈주의로 불리게 된 것이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해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교회중심(Church-centered)이란 개혁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에게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 ‘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이 주창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의 성격을 지닌다. 이제 그러한 노정에 선 목회자 한 사람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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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시간 2016년 2월 12일 오전 6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 지하철역 윌셔 앤 버몬(Wilshire/Vermont) 근처에 있는 나성열린문교회(LA Open Door Presbyterian Church; 1993년 2월28일 설립, 3281 W. 6th st. Los Angels, CA 90020) 새벽기도회. 주일 대예배처럼 성가대 찬양이 끝나고 담임 박헌성 목사가 1층 예배실을 가득 채운 회중과 누가복음 20장을 교독했다. 박 목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작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좋은 면을 보십니다. 좋게 보면 항상 좋고 나쁘게 보면 늘 나쁘기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항상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공관복음 전체를 보면 항상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은 사단의 마음입니다. 성도는 항상 선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매사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예와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22절에서 묻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런 말은 함정적 질문이라고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고 바치라 하면 반민족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가 담긴 속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지혜로우신 대답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악한 간계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논쟁하는 일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박 목사의 강론에 회중은 자주 아멘으로 화답했다. 

“사단에게 빠진 사람과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만 힘들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믿음의 지혜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성직자가 세금을 바쳐야 되냐 안 바쳐야 되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미국은 성직자들이 대부분 바칩니다. 80년대 미시시피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 다닐 때 반 올랜이라는 교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시면서 강의시간에 ‘세금 바치는 것이 옳으냐’ 물었습니다. 미국은 거의 다 바칩니다. 그런데 그분도 바치는 게 좋다 말하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성직자가 세금을 안 바친다고 제재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싫은 사람은 안 바쳐도 됩니다. 이것이 미국의 정책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거의가 세금을 바치죠. 국가에 세금을 안 바치면 혜택을 못 받습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장애인 주차석이 있고 성직자 주차석도 있었어요.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미국은 돈에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고 새긴 나라지만 무신론자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이 성직자에 대한 혜택이나 예우를 없애자고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도 미국은 아직도 중부나 동남부 쪽으로 가면 보수 성향이 강합니다. 미국은 성직자의 세금 문제는 자율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직원은 세금을 떼는 걸 원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장 차림을 해 로스앤젤레스의 랍비라는 별명을 가진 단정한 모습의 박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세금을 떼는 게 정상입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국가의 의무를 피하는 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성도는 국가의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 모든 의무를 감당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 가진 사람은 미국의 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런 게 성직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일들을 담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똑같이 사회와 국가의 의무를 똑같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우리는 천국시민이기 때문에 교회일도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오면 장로나 권사나 집사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까. 세상은 일을 하면 보수를 받는데 교회는 일을 해도 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훨씬 힘든 삶을 삽니다. 한 세상의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세상의 일을 등한시할 수도 없고 저 세상의 일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저 세상의 일을 모르니까 한 세상의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적당히 해서는 안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보고 기도해 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두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도 우리는 늘 힘들다 생각을 안 합니다.”

“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가 있는데 국가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국가가 미국 같은 선한 정부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국가가 기본적으로 교회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어 선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정부와 교회 간에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 같은 국가에는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지 않으니까요. 중국 같은 국가는 선교사를 감시하고 추방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선한 정부입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 좋은 세상에 와서 사는 겁니다. 정부가 신앙을 압박하면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면 안 믿으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세상마다 다 좋은 나라가 아니라 조금씩 다르고 억압하는 나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에 협조한다든가 무조건 반대한다든가 해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장점은 감사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그러나 국가가 단점이 있고 신앙을 핍박하면 당연히 맞서야 합니다. 교회사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일본 식민지 시절 1938년 제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1941년 제30회 총회(총회장 최지화)는 총대 일동이 개회 다음 날 아침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님은 면직을 당하고 투옥을 당해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자기들이 우상한테 절해놓고 거기에 절하지 않겠다는 목사를 벌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거 잘했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회개했습니다. 지금 주기철 목사님은 추앙받고 순교자로 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절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은 나중 잘못했다고 회개하셨습니다.”

“미국을 보면 동쪽은 그래도 양반들이 좀 사는데 서쪽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우리가 여기 살기는 하지만 여기는 교회 건축을 하면 세금을 붙여요. 동쪽에는 세금이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기 살기가 좋으니까 자꾸 몰려와요. 동쪽에 있는 교회는 5천명이 모여도 남자들이 다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정장을 해요. 여기는 더워서 그런지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미국은 아직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미국이 하나님 더 잘 섬기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아요.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문제가 저절로 잘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 남자가 남자끼리 살면 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둘 중에 하나는 여자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신앙으로 살면 그런 문제로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태어나길 그러니 불쌍하다는 겁니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남자는 남자로 살아가고 여자는 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연극을 해보면 여자 역을 잘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지 삶을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겁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화장하고 다니면 되겠어요. 체질적으로 그렇게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살면 됩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정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믿음으로 살아가야지 이것저것 섞어서 살면 안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 유대주의가 제일 싫어하는 게 혼합주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하고 세상 것이 들어오면 버려야지 갈등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이라면 탁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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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성 목사는 총신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 건너와 공부를 하고 부목사로 사역을 한 뒤 38살 되던 1993년 2월28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장 중심지인 윌셔에 나성열린문교회(The Los Angeles Open Door Church)를 개척 설립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 교육, 선교, 봉사라는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나성열린문교회를 설립해 3천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신앙의 공동체로 크게 부흥시킨 탁월한 목회자다. 

2001년 교인수 3500여명으로 성장한 나성열린문교회는 LA 동쪽 끝자락인 6가와 보니브레아 스트리트가 만나는 부지에 2011년 3월 LA한인타운 인근 최대 규모의 한인교회 성전이 건축 10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000만달러가 투자된 건축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풋볼구장(5만8000스퀘어피트) 2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12만6000스퀘어피트 부지위에 빌딩 11층 높이의 성전이 솟아있다. 타운 인근 한인교회 예배당 중 가장 크다. 건물 외벽과 강단 계단도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으로 장식했다.

2001년 1월 성전 부지와 현재 예배장소인 교육센터를 540만 달러에 구입하고 공사는 2005년 5월 시작했다. 땅 매입부터 따진다면 꼭 10년이고 공사는 6년 걸렸고 공사비만 5000만 달러 투입됐다. 본당은 1층과 2층 합해 2000석, 친교실은 1000석, 주차장은 500대 주차할 수 있는 대형 파킹장에 실내 체육관까지 완비한 예배당이었다. 본당은 빌딩 11층 높이로 천장이 높아 시원하고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과 외벽과 강대상 계단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을 입혔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색을 띈다. 본당 정면 벽에는 관이 22개인 대형 파이프 오르간도 놓여진다. 타운 한인교회로는 가장 컸다. 그 완공을 몇 달 앞두고 박헌성 목사는 2011년 3월 1일 당시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건축의 소명에 대해 말했다. 

"지난 18년간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교인이 많아졌고 큰 예배당이 필요했습니다. 장소를 찾다보니 LA 한인타운 내 대형집회를 열 만한 예배장소가 하나도 없더군요. 기도 중에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눈물어린 어려움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융자금 이자만 매달 16만달러다. 공사가 한달 연기되면 7~8만달러 추가된다. 난 집이 없다.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냈다. 성도들의 눈물로 기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11년 5월말 입주 예정이던 교회는 7년간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성전을 차압당했다. 당시 은행 측이 밝힌 차압 이유는 8개월간 180만 달러의 융자 페이먼트를 연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2년 9월 사용 중이던 건물에서도 퇴거를 당하고 채권은행인 ‘기독교 신용조합’(ECCU) 측과 2016년 지금까지 소유권을 놓고 소송 중에 있다. 

박헌성 목사는 교회 성장과 교회 건축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이제 61세가 되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박헌성 목사는 힘차게 목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 학교를 맡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 125 S. Vermont Ave. Los Angeles, CA 90004)라는 어엿한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는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되어 지난 38년 동안 이민교회에 필요한 개혁주의 지도자를 배출, 양성해 왔다. 총신대 총장을 지낸 김의환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이진태 목사를 초대 학감으로 시작된 이 신학대학은 1987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정식학위 (B.A., M.A., M.Div., D.Min.)를 줄 수 있는 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97년 미국 국토안보부로부터 F-1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2013년 2월에는 연방정부교육부가 인정하는 신학대학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정회원 인준을 받았다. 2016년 2월달에는 연방정부 교육부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BACM (교회음악 학사) MACM (교회음악 석사) MAC (상담학 석사) 학위과정을 인가받았다. 현재는 총장에 박헌성 박사가 섬기고 있다.

IRUS는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이 지향하는 신학을 교회와 세상에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취함에 있다. 본교는 칼빈주의 유산인 하나님 주권, 하나님 중심적 예배, 성경중심적 교육과 교회중심적인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에 열린교육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침으로 실질적인 사역의 능력을 갖춘 사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로 하여금 세계선교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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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박헌성 목사는 어느 목회자도 감당하기 힘든 성장과 역경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태에서부터 60여년의 신앙의 삶을 통해 더욱 성숙해진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으로 제네바의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처럼 LA의 개혁주의자 칼빈 박헌성 목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과 한국의 칼빈주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리라 믿는다. 랜드마크(landmark) 또는 경계표(境界標)는 원래 탐험가나 여행자 등이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제 그 뜻이 더 넓어져 박헌성 목사가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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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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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칼빈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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