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모세와 십계명 2.JPG
 

Lesson XII

도덕의 법칙
Moral Law

서울이 39.6도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올해의 여름날처럼 연일 혹독한 무더위가 이어지다 보면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도 지치고 고달프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옆을 돌아보면서 안부를 묻고 작은 것이라도 챙겨줄 일입니다. 여름이 익으면 가을이 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합니다. 불완전하기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나를 신나게 살게 하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사람 사이에 잔잔한 믿음의 강물이 흐르도록 할 일입니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저기 깨지기 쉬운 그러나 세상에서 드세기로 유명한 사람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해 명예가 무너지고 재산이 파손되고 건강이 부서진 ‘파손주의’라고 써진 등짝을 보세요. 잔소리에 깨지고 뼈있는 말에 파손되고 속임 말에 넘어간 가슴에 ‘취급주의’가 새겨진 사람을 보세요. 슬픔에 갇힌 질그릇 하나가 갑니다.

어느 때 사람은 유리 같습니다. 어찌 할 사이 없이 명예와 재산과 건강을 잃기도 하고 무정한 말들에 찔리고 부서지기도 합니다. 그는 골고다의 그리스도처럼 걸음마다 피를 흘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취급할까요. 이 슬픈 질그릇을. 이 연약한 폭발물을. 우선 모두가 생각보다 쉽게 파손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서로 어지간히는 ‘주의’하므로. 깨졌다고 그냥 주저앉으려 하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를 고치고 붙여서 다시 걸으려 하니까요.

진리를 알기 위해 애쓰던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죄에서 구원해주십시오. 그러나 아직 다는 아닙니다.”

얼마 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 가지 죄만 빼고 저의 죄에서 구원해주십시오. "

얼마 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모든 죄에서 지금 구원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와 악을 떠나기로 굳게 마음을 먹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죄와 악에 끌리는 사람은 이런 말에 절어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중독성 없이는 쾌락이란 없지. 허무로 먼지로 죽음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중독성이란 없지.”

칼빈의 신학은 그의 평생에 걸쳐 사실상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36년 라틴어 초판이 나온 이래 1559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확장되었습니다. 초판은 단 1권 6장에서 출발해 마지막 판은 4권 80장으로 끝났습니다. 4권 각 책은 사도신경(creed kriːd])의 신앙고백을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1권(Book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on God the Creator), 2권(Book 2) 그리스도 안의 구세주(on the Redeemer in Christ), 3권(Book 3)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에 대해(on receiving the Grace of Christ through the Holy Spirit), 4권(Book 4) 그리스도 또는 교회의 사회(on the Society of Christ or the Church) 등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책의 시간은 기억의 시간, 믿음의 시간, 개혁의 시간입니다.

칼빈의 전기 작가 파커(Parker 1995, pp. 1314)는 이렇게 말합니다.

The first statement in the Institutes acknowledges its central theme. It states that the sum of human wisdom consists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Calvin argues that the knowledge of God is not inherent in humanity nor can it be discovered by observing this world. The only way to obtain it is to study scripture. Calvin writes, “For anyone to arrive at God the Creator he needs scripture as his Guide and Teacher.”
『기독교강요』의 첫 진술이 그 책의 중심 주제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지식(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진술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 본성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을 관찰함으로써 발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얻는 유일한 길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인도자와 선생으로 성경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항에서 우리의 죄와 연관이 있는 도덕의 규칙에 대해 설명합니다.

1. I believe it will not be out of place here to introduce the Ten Commandments of the Law, and give a brief exposition of them. In this way it will be made more clear, that the worship which God originally prescribed is still in force a point to which I have already adverted;
나는 여기에서 율법의 십계명을 소개하고 간략한(brief briːf) 설명(exposition kspzn)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지(out of place)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여(In this way) 하나님께서 원래 규정하신(prescribe priskrib) 예배(worship wːrip)는 내가 이미(제7장 ‘율법의 목적’에 대해) 언급했던(advert ædvːrt) 요점(point pint)이 여전히 유효합니다(in force).

and then a second point will be confirmedviz. that the Jews not only learned from the law wherein true piety consisted, but from feeling their inability to observe it were overawed by the fear of judgments and so drawn, even against their will, towards the Mediator.
그리고 다음에 둘째 요점이 확증((confirm knfːrm))될 것입니다. 즉(viz 리틴어 videlicet ‘비데리케트’의 약어인데 보통 영어로 ‘namely nimli’ ‘네임리’라고 읽음) 유대인들은 그 곳에(wherein hwεrn) 참된 경건(piety piti)이 들어있는(consist knsst) 율법에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그것을 준수할(observe bzːrv) 수 없다는 것(inability nblti)을 감지했기 때문에(from feeling) 심판의 두려움으로 억눌렸고(overawe uvrː) 심지어(even ːvn) 그들의 의지에 반하면서도(against their will) 중보자(mediator mːdiitr)에게 마음이 끌리게(drawn drːn ‘draw drː’의 과거분사) 되었다는 것이 확증될 것입니다.

In giving a summary of what constitutes the true knowledge of God, we showed that we cannot form any just conception of the character of God, without feeling overawed by his majesty, and bound to do him service. In regard to the knowledge of ourselves, we showed that it principally consists in renouncing all idea of our own strength, and divesting ourselves of all confidence in our own righteousness, while, on the other hand, under a full consciousness of our wants, we learn true humility and self-abasement.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요약(summary smri)했을 때 우리가 그의 존엄(majesty mdisti)에 위압되고(overawed uvrːd) 그를 섬겨야 한다는(bound to do him service) 느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어떤 바른 개념(conception knspn)도 품을(form fːrm)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과 관련하여(regard rigːrd) 우리 자신의 힘(strength streŋkθ)에 대한 모든 사상을 포기하고(renounce rinuns),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모든 신념을 스스로 벗어버리는(divest divst) 한편(while hwail) 이와 반대로(on the other hand) 우리 자신의 빈곤에 대한 완전한 자각(consciousness knsnis)하에(under ndr) 우리는 진실한 겸손(humility hjuːmlti)과 자기 비하(self-abasement bismnt)를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Both of these the Lord accomplishes by his Law, first, when, in assertion of the right which he has to our obedience, he calls us to reverence his majesty, and prescribes the conduct by which this reverence is manifested; and, secondly, when, by promulgating the rule of his justice, he charges us both with impotence and unrighteousness.
...
첫째로 그가 우리의 복종을 받으셔야 하는 권리의 주장(assertion sːrn)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위엄에 대한 숭배(reverence rvrns)를 요구하시고, 그리고 주님은 이 숭배가 나타나는(manifest mnfst) 행위(conduct kndkt)를 규정하는(prescribe priskrib) 그의 율법으로(by his Law) 이 두 가지 일을 다(both of these) 이루십니다(accomplish kmpli). 그리고 둘째로, 그는 무기력(impotence mptns)과 불의(unrighteousness)로 우리를 책망하실 때 그의 정의(justice dsti)의 규칙을 공표(promulgate prmlgit)하심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을 다 이루십니다.

...

소요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문 3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 나타내 보이신 뜻을 복종하는 것입니다.

문 40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도덕의 법칙입니다.

문 41 이 도덕의 법칙이 어디에 간략히 포함되었는가.
이 도덕의 법칙은 십계명에 간략히 포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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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은 디케(Dike)입니다. 디케는 정의(正義) 혹은 정도(正道)라는뜻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유스티티아(Justitia)로 대체됐는데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는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디케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유스티티아는 여기에 형평을 지킨다는 의미로 저울이 더해졌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칼은 정확한 판정에 따라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저울은 엄정한 정의의 기준을 상징합니다. 디케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정의와 불의의 판정에 있어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 대법원 건물에 거대한 그림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폴 로버트(Paul Robert)라는 화가가 그린 그 그림의 제목은 재판관들을 가르치는 정의의 여신(Justice Instructing Judges)입니다. 그림의 전경에는 소송 당사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남편을 고소한 아내 건축주를 고소한 건축가 주정뱅이를 고소한 술집 주인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소송 당사자들 위에는 작은 하얀 장식용 가슴판이 달린 법의를 입은 스위스 재판관들이 서있습니다.

이 재판관들이 다양한 소송 당사자들을 어떻게 재판해야 할까요. 이 그림에 그 답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대개 눈을 가린 채 손에 든 칼을 위로 치켜들고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그려진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지 않고 손에 든 칼을 아래로 향하고 서있습니다. 그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적힌 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책 The Bible에 인간이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십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그에게 원하시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기 멋대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주요 목적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던 십자가의 대속 형벌을 통하여 종식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율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개별적인 죄들을 구체적으로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와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십계명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십계명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첫째 판의 계명들은 그리스도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둘째 판의 계명들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요약된 계명들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정의하셨습니다.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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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I 도덕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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