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제네바 종교개혁 기념벽.JPG

Lesson VI
지중해와 중세
Mediterranean and the Middle Ages

젊은 시절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에게 큰 영향을 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년 - 1971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르니에는 아름다운 산문을 여럿 남긴 수필가이기도 했다. 카뮈는 스승의 문체에 대해 말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르니에 산문의 정수(精髓)가 담긴 『지중해의 영감』(Inspirations mdi -terranennes, 1941)은 그가 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품고 있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산문집이다. 알제리의 카스바를 찾았던 그르니에는 그 영감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날빛이 푸른색 타일들의 색깔에서 노란색 타일들 색깔로 변해가도 그들(카스바 주민들)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그냥 그대로 멈추어 있습니다. 식물들의 삶처럼 그렇게 늘어져 느리게 흐르는 삶이 무엇보다 시(詩)에 어울린다는 상상을 해보곤 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어떤 하나의 지형(地形), 그것이 바로 지중해(Mediterranean mdtrinin)의 정신을 만들어냅니다. 공간일까요. 그것은 어깨의 둥그런 곡선이며 얼굴의 타원형 윤곽입니다. 시간일까요. 그것은 해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달리는 한 젊은이의 질주입니다.”

그르니에는 책 서문에서 “지중해는 절대의 숭배로부터 그리고 행복의 숭배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의 계시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때 그런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호언하던 로마도 3세기 말에 이르자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년  312년 재위 284년 - 305년)는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필사적인 재건 개혁도 헛되이 쇠퇴 일로를 걸었습니다. 인구는 감소되고 경제는 굳어 화폐거래보다 실물경제(實物經濟: 돈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만 중시되는 물물경제)화 했습니다. 토지는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독점되어 자유농민과 중간층은 몰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년에 막강함을 자랑하던 로마군이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無力化)하고 마침내는 475년 서고트족이 동로마의 국경을 침입하자 사상 유례가 드문 일대 민족 이동을 유발하고 말았습니다.

제일 먼저 국경을 침입한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고 서진하여 서로마군을 격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습니다. 이리하여 410년 ’영원한 도성‘ 로마가 함락되고 잇따라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이 로마의 다른 영토를 유린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약 일천 년의 중세(Medium aevum 476-1453)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476년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즉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충돌은 그 두드러진 예였습니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096년에서 1100년에 이르기까지 3회에 걸쳐서 단행되었습니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고 르네상스의 씨앗이 이미 그 시대에 뿌려져 있었습니다. 중세 후기는 결코 르네상스의 예고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둠과 광기의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성(聖)과 속(俗)은 달뜬 활기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는 데이트 여행이었고 교회 안에서 매춘부가 호객 행위를 했습니다. 성 유물을 전시하는 건너편에서 알몸 공연이 벌어졌습니다. 중세인들은 자주 울었고 쉽게 감동받았고 잔인했고 무절제했습니다. 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지만 사형수의 마지막 참회에는 다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탕에 가까울 정도로 향락을 즐기는 동시에 종말론과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이런 모순이 너무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정서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눈물을 부끄러워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무관심을 미덕으로 받드는 현대가 중세보다 더 기괴한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지도를 만들었고 이 지도를 이용해 세계를 바꿔나갔습니다. 지도는 당대인들의 세계관을 볼 수 있는 거대한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중세 지도에선 수도원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뤄지던 당시 인류의 자기 인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정 구역 건물부터 골목까지 범죄율을 일대일로 매핑해 표시한 19세기 샌프란시스코 ‘범죄 지도’에선 모든 것을 수치화하던 근대적 인간의 욕망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위치 정보 버튼을 '온(ON)'으로 켜놓고 다니는 요즘 사람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한편 칼빈이 태어난 1509년 16세기 초엽 독일에서는 인문주의자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 로마 교회의 미신적 교리와 교권에 항거하고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와 같은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 ~ 1384년)를 거쳐 마침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에 이르러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네바의 칼빈과 스위스의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 - 1531년 10월 11일) 등은 각각 타당한 명분을 내걸고 로마 교회와 대결하여 개혁운동을 촉진시켰습니다. 이 개혁 운동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라는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개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13, 14세기 이래 연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갔습니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이 약한 나라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Leo PP. X, 제217대 교황 재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 rfrmin)이 시작되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습니다.

1524년과 1525년 재세례파(Anabaptist nbptist) 지도자 뮌처(Thomas M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격려로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습니다.

이 혼란한 종교개혁 시기에 1536년 3월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이 열정과 달변의 뛰어난 신학자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신학자의 과업이 성서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겸손하고 고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칼빈보다 더 통렬하게 자각하고 있던 인물이 아무도 없었습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영어 입문 과정에서 to 부정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어의 부정사(infinitive)란 시제나 수에 따라 변화하지 않은 동사 다시 말해 동사의 원형을 말합니다. 영어의 부정사 구문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사는 ‘수와 인칭 등이 정해지지 않은 말’이란 뜻입니다. 아래에 용법 같은 게 나오긴 하지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to 부정사 자체가 문장의 일부를 대체 혹은 추가하는 문구이므로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어부분에 오면 주어처럼 해석합니다. I want to eat이면 먹고 싶다라든가... 그냥 ‘이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고 실생활에서 느낌을 익히는 것이 훨씬 유용합니다.

to부정사는 70~80%가 하기 위해 부사적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to 자체가 어딘가로 항하는 방향성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to부정사가 부사절, 형용사절, 명사절로 쓰여도 결국 모두 ‘to 이하를 하려는’ 또는 ‘to 이하로 가려는’ 의미로 귀결됩니다. 왜냐하면 본래 부정사가 형태가 정해지지 않아 동사적 특성을 띤 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o 이하 문장구조와 내용에 따라 그 뜻은 달라집니다. 간단한 예로 다음과 같습니다.

Calvin lived to be 55 years old. 칼빈은 55세까지 살았습니다.
Jesus came to my rescue. 예수님은 나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Lord has been pleased to give His life. 주께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기독교강요』 영어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다음의 본문에서 실제로 to부정사가 사용된  ‘My intention was only to furnish a kind of rudiments’(제 의도는 단지 기초 원리를 제공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1536년 바젤에서 처음 출판된 『기독교강요』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헌사 첫 머리에 JOHN CALVIN PRAYS PEACE AND SALVATION IN CHRIST.’(존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구원을 기도드립니다)는 왕에 대한 인사에 이어 칼빈의 헌정 저서 『기독교강요』의 저작 의도를 말합니다.

프랑수아1세 사진.JPG
프랑수아 1세 

Sire,--When I first engaged in this work, nothing was farther from my thoughts than to write what should afterwards be presented to your Majesty. My intention was only to furnish a kind of rudiments, by which those who feel some interest in religion might be trained to true godliness.
폐하(Sire sair]) 제가 이 일을 처음 착수하게(engage engid) 됐을 때 나중에(afterwards ftrwrdz) 폐하(your Majesty mdisti)께 헌정(present priznt ‘선물합니다’ 뜻의 단어 악센트는 뒤에 붙음)해야 할 것을 쓴다고는 전혀(nothing nθiŋ) 생각(thought θːt)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Nothing ~ 비교급 than’의 용법을 잠깐 살펴봅시다. Nothing is easier than to cheat him. 그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Nothing was farther from my thoughts than to write 쓰는 것만큼 내 생각에서 먼 것은 없다.) 제 의도(intention intnn)는 종교에 어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godliness gdlines)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초 원리(rudiment rːdmnt)와 같은 것((a kind of))을 제공해(furnish fːrni)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And I toiled at the task chiefly for the sake of my countrymen the French, multitudes of whom I perceived to be hungering and thirsting after Christ, while very few seemed to have been duly imbued with even a slender knowledge of him. That this was the object which I had in view is apparent from the work itself, which is 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그리고 저는 주로(chiefly tːfli) 제 동포(countrymen kntrimen) 프랑스인들을 위해서(for the sake of) 그 고된 일(task tːsk)을 수고했습니다(toil til). 저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multitude mltitjːd) 그리스도에 굶주리고(hunger hŋgr) 목마른(thirst θːrst) 것이 보였습니다(perceive prsːv). 그러면서도(while hwail) 그리스도에 관한 빈약한(slender slndr) 지식조차도 제때(duly djːli) 받는(imbue imbjː) 사람이 아주 소수(few fjuː)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목표했던(in view vjuː) 대상이 본 저서에서 드러난(apparent prnt)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훈련(instruction instrkn)에 적합하게(adapt dpt) 단순한 초등교육의(elementary lmntri) 형식으로 저술한 것입니다.

칼빈이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말하듯이 『기독교강요』의 저술 목적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굶주리고 목마르지만 그 양식을 제때 공급을 받지 못하는 무지렁이 프랑스인을 세종대왕처럼 어여삐 여겨 훈련에 적합하게 ‘단순한 초등교육의 형식으로 저술한’(which is 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15-17에서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nd that from a child thou hast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thee wise unto 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o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이 말씀처럼 『기독교강요』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위한 쉬운 교리문답서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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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 지중해와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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