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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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었던 땅과 마른 가지에 싹과 꽃을 피워내며 봄이 찾아온다. 놀랍다. 죽음을 이겨내듯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 봄. 이맘때쯤 먼 옛날 아테네 사람들은 축제를 벌였다. 막 농사를 시작할 판에 디오니소스를 기린 것이다. 디오니소스 일명 바쿠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하여 그의 은총에 흠뻑 젖어 실컷 놀고 나면 일할 힘이 새롭게 솟아날 테니 그 축제 정말 그럴듯할 것이다. 하지만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기 이전에 술을 빚어낼 포도 재배와 추수의 신이었다. 농사를 시작하며 풍년의 기원을 담아 제사를 지낼 대상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디오니소스의 아버지는 제우스였다. 제우스는 세멜레라는 처녀를 사랑했고 한 아이가 잉태되었다. 남편의 외도에 분노한 헤라는 세멜레를 꼬드겨 제우스의 원래 모습을 보게 했고 세멜레는 그의 번개·광채·열기 때문에 타죽고 말았다. 그 순간에 제우스는 세멜레의 태 안에 있던 아이를 발견했고 재빨리 꺼내 자기 허벅지에 넣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아이는 얼마 후 제우스의 몸에서 신으로 거듭 태어났다. 그가 바로 디오니소스였다. 곡절 많은 탄생으로 그는 부활의 계절인 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신이 되었다.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물은 뿔 난 숫염소였다. 정력과 다산 그리고 건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제물은 풍년을 기원하며 신에게 바치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축복을 위해서는 죄로 더럽혀진 자신을 깨끗이 씻어내는 정화와 회개의 의식이 필요했다. 그때 제물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 대속물(代贖物)이었다.

신전에 모인 사람들은 불에 타 재가 되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죽음을 체험했고, 나아가 정화와 부활의 기쁨을 누렸다. 사제가 숫염소를 바칠 때 제단을 둘러선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다. 이 제의적 합창을 ‘트라고디아’라고 했다. ‘숫염소’(트라고스)의 ‘노래’(오데)라는 뜻이며 영어 ‘tragedy’의 어원이다. 처음에 트라고디아는 합창이었지만 여기에 배우가 추가되면서 점차 연극처럼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슬픈 연극 ‘비극’이라고 옮긴다.

비극의 극장은 단순히 극장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의 신전이요 예배당이었다. 비극은 제의(祭儀)의 진화된 형식이었다. 무대 위의 주인공은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과도 같았다. 합창단의 지휘자는 제의를 집행하듯 무대 위의 사건을 이끌면서 주인공을 파멸시킨다. 예컨대 오이디푸스가 무대의 중앙에 서는 순간 그는 제단의 제물과도 같다. 그는 테베의 왕인데 테베는 지금 역병에 오염되어 수많은 사람이 죽어간다. 도시가 더럽혀진 것은 전왕 라이오스의 살인자가 도시에 숨어 있기 때문이었고 그를 찾아내 징벌하고 추방해야 도시가 정화되고 구원된다. 오이디푸스는 그 일을 해내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사건이 전개될수록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진실에 직면한다. 게다가 곁에 있는 아내 이오카스테는 어머니였고 자신이 죽인 라이오스는 아버지였다. 모든 것이 밝혀진 순간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른다. 운명에 대한 절망이지만 동시에 도시의 정화와 구원을 위한 자기 징벌이며 시민과의 약속을 실행한 것이다. 비극은 파국적 종말로 끝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를 통해 자신을 비춰 본 관객의 마음에 정화와 부활의 기쁨이 함께 차오르면서 비극은 고유한 절정에 이른다. 이 절정의 사건을 제의적 ‘카타르시스’(catharsis) 또는 정화(淨化)라 불렀다. 여기에 그리스 비극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단지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눈물을 자아내는 슬픈 연극이 아니다. 관객이 무대 주인공과 하나가 되어 뜻하지 않는 운명의 한계에 부딪혀 실수하고 무너지는 체험에서 죽음을 겪고, 마침내 카타르시스의 환희를 만끽하는 데에서 비극은 완성된다. 그런데 비극을 즐기는 그리스인이 아닌 예배를 즐기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부활절은 다가오는데 무엇으로 부활의 카타르시스의 환희를 느껴야 할까.

우리나라 최대 생활권인 서울·인천·경기 지역에는 2,600만 명이 살고 있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은 그저 500명 남짓이다. 그러니 수도권에서 일상생활을 하며 감염자를 만날 확률은 0.002% 즉 5만분의 1이다. 불가능한 우연의 겨우 두 배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이 아직 100명 미만이니 인구 5,180만에 비하면 0.0002%도 되지 않는다. 50만분의 1은 쌍둥이를 연달아 세 번 낳을 확률이다. 2019년 교통사고 사망자는 모두 3,349명이었다. 보행 중에 1,302명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가다 1,150명이 사망했다. 이쯤 되면 차 없는 나처럼 운전도 포기하고 그것도 성에 안 차면 아예 길바닥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 어서 빨리 이 괜한 불안과 혐오의 간격을 걷어내지 않으면 저소득층과 소상공인은 조만간 바이러스가 아니라 가난으로 죽을 수 있다. 자연에서 완벽한 박멸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잘 다스리며 공존해야 한다. 최근 다시 미세 먼지 사정이 나빠지고 있다. 후베이성을 제외하곤 중국이 일상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다. 세계 경제의 엔진이 다시 시동을 걸고 있다. 이제 우리도 우리 방역 시스템을 믿고 조심스레 이 기적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자. 죽음을 지켜보지 말고 삶의 길로 나아가자. 조심스레. 산모퉁이 바람 불어와 좋다 하니 바람도 좋다, 좋다 살랑살랑 지나간다. 시냇물에 발 담그고 좋다 손뼉 치니 시냇물도 좋다, 파란 하늘 보고 좋다 하니 양떼구름 새털구름 좋다, 오솔길에 드리운 보라색 그림자, 공기 중에 감도는 분홍 햇빛, 바람에 흔들리며 노랑, 초록, 주홍으로 달리 보이는 나뭇잎은 날씨가 온화한 어느 날 한가롭게 무등산 길을 걷는 느낌을 준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아 답답한 시기 시인 소강석 목사는 시집을 하나 내면서 그 소회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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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시뿐 아니라 ‘코로나19’ ‘손 소독제’ ‘마스크’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기도시 ‘갈대가 별이 되게 하소서’ 등을 새롭게 써서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다’라는 시집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코로나 때문에 문화예술계가 다 정지되어 버린 상황에서 무슨 시집을 내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암울한 일제강점기 때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청록파 시인들의 서정시를 읽으며 상처를 치유 받고 새로운 희망을 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코로나의 고통 속에서 제 시를 읽으며 위로와 치유를 받기를 바라지만 코로나 이후를 준비하고 내다보는 시를 썼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꽃같은 영혼들이 갈대로 헤어졌잖아요. 꽃같이 만난 우리가 갈대로 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갈대로 헤어져 있더라도 코로나가 물러가면 다시 꽃으로 만나자는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코로나 위기 때 저의 시를 통해서 한 사람이라도 위로와 치유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꽃으로 만나 갈대로 헤어지지 말고 갈대로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꽃으로 만나는 회복과 축복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목소리로 시를 썼다. 그가 말하듯 속삭이는 듯 읊조리는 단어 마디마디가 가슴 속에 내려앉아 듣는 이의 마음의 상처를 부드럽게 유려하게 어루만졌다. 담담했기에 더 절절하고 담백했기에 더 가슴 미어졌다.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이젠 괜찮아질 거라고 고생 많았다고 그는 목소리로 우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지독한 준비 설교자이고 연습 벌레 가수이기도 하다. 호흡을 어디서 쉴지 어디에서 세게 부르고 약하게 할지 여기서 저기서 멈춰보고 강약도 주고 여기서 긁어보기도 하고 저기서 살살 불러보기도 하면서 수만 개 조합 중에서 최적의 소리를 찾은 뒤 몸에 익을 때까지 준비하고 연습한다. 연습시간은 밤을 새우기 일쑤다. 그렇다고 형식에만 얽매인 것도 아니다. 찬양하고 하모니카도 불고 몸을 쥐어짜며 가요도 부르는 그의 설교 목소리에 서린 따뜻함과 배려는 교인들에게 위로와 안식이 됐다. 기계처럼 보일 법한 그의 완벽주의에 사람 향기가 배어있는 건 체온이 느껴지는 그의 표정과 몸짓과 목소리가 주는 힘이다. 그는 그냥 잘해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연습 또 연습 이전보다 더 낫게 들릴 수 없을까, 고민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때도 많았다. 그런 그가 코로나 사태로 예배를 정해진 대로 드릴 수 없는 현실에 이런 글을 썼다.

... 어느 국회회원은... 종교집회를 제한하도록 하고 부득이 신청하는 교회만 허락하도록 하자는 주장도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무슨 공산국가도 아니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그렇게 복음의 진리와 가치가 사라질 불꽃이었다면 진작 사라져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로마 시대의 성도들은 카타콤 지하동굴에 들어가 죽기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동구의 교회 그리고 중국과 북한의 지하교회와 가정교회 등 그 어떤 핍박과 역경 속에서도 예배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스페인 독감이 번져서 20여만 명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도 주일예배를 드렸고 오히려 거리로 나가 3.1운동을 일으켰습니다. 6.25전쟁 중에도 예배를 드렸고 광주민주화운동 중에도 예배를 생명처럼 지켰습니다.

다만 지금 우리는 국민보건과 공적 교회로서의 책임 때문에 예배의 정신과 가치는 지키되 방법을 달리하여 온라인예배로 전환한 것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예배의 가치는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설사 한국교회를 향하여 어떠한 행정명령이나 법적 조치가 내려지든 예배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불꽃이 아닙니다. 아니 한국교회는 그럴수록 더 모이고 성도들은 더 결기 있는 저항과 연합정신을 발휘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배를 향한 불꽃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불꽃이 더 활활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8

그렇듯 소강석 목사는 사나 죽으나 주를 향한 예배의 불꽃뿐인 것 같다.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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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예배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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