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한 설교가 윤희원 임재의식
2019/08/16 12:5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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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역 지나 총회 있는 삼성역을 거르면 누에가 고치를 트는 잠실역이 시작되고 엄마야 누나야 같이 살자는 강변역을 지난다. 꼬꼬부랑까지 아홉 노인이 살았다는 구로역 지나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역을 지나면 다시 큰 무덤이 있는 선릉역 지나 근처에 총회가 초라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는 삼성역이다. 매일 200만 명이 이 순환선을 오르내린다고 한다. 곧 도착할 삼성역에서 총회 취재 삼아 가기 위해 나는 내릴 것이다.
 
독일의 제일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루터파 개신교의 신실한 교회 음악가였던 바흐는 1707년 10월 17일 결혼 후 더 나은 대우로 작센 바이마르 대공의 궁정교회와 실내악단에서 초빙을 받고 1708년 7월 4일 감사의 편지를 대공에게 보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앞으로 교회를 위해 정연한 음악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음악이 ‘정연하다’는 의미는 작곡을 하는 데 있어서 손이 이끄는 데로가 아니라 질서와 균형 그리고 음악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물리적인 음악이다. 이런 음악은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의 칸타타 수난곡 혹은 평균율 같은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손이 이끄는 대로 즉 일필휘지(一筆揮之)가 습관이나 배운 대로 하는 작곡이라면 이성적인 논리와 사고로 작곡을 한다는 것은 이성과 관습을 뛰어넘는 학문적인 음악을 만들고자 했던 바흐의 어떤 창조성을 의미한다. 정연하다는 것은 짜임새가 갖추어지고 조리가 있는 창조성이다. 사실 작곡에 대한 바흐의 이러한 태도는 베토벤 같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베토벤이 작곡할 때 ‘왜’ ‘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작곡에 있어서의 인과관계를 끊임없이 묻고 고민했던 태도였을 것이다. 평균율 곡집이 바흐의 논리적인 음악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곡의 위대성은 장단조의 정착과 고난이도의 대위법 완성 그리고 모든 조성 즉 열두 개의 단조와 열두 개의 장조를 통한 잘 조율된 조성 즉 평균율이 만들어지게 된다. 바흐는 이론을 알면 그것을 실증해 보이는 학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의뢰받지 않은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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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신대 재학시절 기독교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는 윤희원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8월 5일 짙은 뙤약볕 아래 전주초등학교 건너 전주효성교회 앞에 섰다. 터미널 건너 오래 기다려 탄 버스인데 정류장을 잘못 내려 고집스레 걷고 걷다 30여 분 늦게 도착했다. 설교가 선포되고 있었다. 야고보서 1:19-25 ‘행복인가? 거룩인가?’ 천국의 소망에 대한 바흐의 작곡 태도가 배어 있는 설교였다.
 
지난 1992년 11월 24일 전주효성교회 담임으로 취임한 윤희원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강단이 있는 목회를 지향해왔다. 효성교회는 2012년 교회건축을 끝내고 입당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는 교회건축을 위해 성도들에게 건축헌금 강요한 일도 없었고 건축헌금을 위해 부흥회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건축과정에서 교인들이 전세금을 가져왔습니다. 이들의 정성에 대해 감사했지만 받지 않고 목회 원칙을 지켰습니다. 때로는 유혹도 도사리고 있지만 먼저 나 자신부터 이벤트성 성장목회를 금하고 있으며, 성도들에게도 기복신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칼빈주의 원리에 의한 목회를 지향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말씀중심과 교회중심의 가르침과 저의 목회지향에 대해 대다수의 성도들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려웠던 생활고와 부친의 목회에 대한 반발심이 잠재해 있어 목회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점차적으로 목회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 동기에 대해 그는 술회했다.
 
“부친이신 윤남중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실 신학을 전공하기 전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총신대학교 1학년 초기에도 갈등이 있었지만 부친의 권고로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시 부친께서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신학을 전공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윤희원 목사의 목회 지향점은 초대교회와 같은 가정교회다. 그는 효성교회 원로인 윤남중 목사의 장남이다. 윤남중 목사는 전북 완주 출신으로 전주효성교회를 담임하면서 전북노회장 전북신학교이사장 전북노회유지재단이사장 신흥중고·기전여중고 이사 등으로 섬겼다. 특히 1980년 총회 분열 당시 남아있는 교회들을 수습해 전북노회를 지킨 대표적 공로자 중 한 분이다. 1992년 전북노회 제114회 정기회에서 최초로 공로목사 추대를 받은 윤남중 목사가 2015년 별세한 후, 전북노회는 후배들에게 목회자로서 사표가 되었던 고인의 생애와 신앙을 기리고자 윤남중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해마다 신학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윤희원 목사는 전북의 정신적 리더로서 총회를 위한 봉사의 끈도 놓지 않고 있다. 반기독교세력대응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된 윤희원 목사는 말했다.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각종 현안들이 성경과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연구하고, 설득력 있는 논리와 대안을 제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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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실제적인 대안을 2018년 8월 27일자 기독신문 논단에 바흐의 작곡 태도처럼 정연한 논리로 밝혔다.
 
누군가 “왜 우리 총회는 개혁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은 우리 모두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도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고 합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역사도 기록될 수 없고 실상 자신도, 우리라는 공동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인 출애굽을 기억하게 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 다시 오심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기억하는 것이 신학이요, 기억하여 사는 것이 신앙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기억의 역사는 늘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광야 40년의 방황의 세월을 끝내고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한 문제는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던 하나님을, 그 축복의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며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기억해야 할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구원하셨습니다(출 2:24,25).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그들을 통해서 섭리하셨습니다(출 5:13).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면한 하나님에 대한 기억, 이해는 그 땅에서의 번영과 성장을 지금까지 인도하고 섭리하신 하나님이 주느냐? 아니면 바알이 주느냐? 하는 새로운 이해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기억상실증에 걸렸습니다. 이 기억상실증에 대한 책망을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가나안을 정복하여 정착하기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의 모든 일을 아는, 기억하고 있는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만 하나님을 섬겼다고 합니다(수 24:31, 삿 2:6).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영과 풍요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잊었으며 하나님보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더 사랑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사들을 세우시고,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하나님을 잊고 사는 그 우상 숭배적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그’ 말씀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기억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임금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며, 왕이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삼상 15:22,23). 왜냐하면 말씀을 버리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이 없으면 참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닙니다.
 
실상 이 임재의식의 유무는 율법이나 제도화된 성막이나 성전에서 오지 않습니다. 율법을 주셨고, 성막과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 속에 세우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셨어도 그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여 임재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신앙, 그 경건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국무총리 되었던 요셉은 율법도 없었고, 성막도, 성전도 없는 애굽 땅에서 노예가 되어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사는 경건, 그 임재의식으로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하고 유혹의 자리의 죄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7장에서 모세가 레위 제사장과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행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은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임재의식이 없으면 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교단의 103회 총회는 개혁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총대가 개혁을 부르짖지만 다 개혁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혼돈 속에 있습니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고 개선과 개혁을 분별하지 못하는 혼미함 속에 있기에 필자는 금번 총회도 조금 개선은 되어도 개혁되지 아니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개혁은 몇 사람을 새로 선출하는 것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라는 이 임재의식,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말씀을 행하는 자(약 1:22)로서 살아갈 때 진정한 개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임재의식이 있다면 우리는 산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잠에서 깨면 의식, 정신이 돌아오듯이 산 신앙을 가진 자는 행함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기에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나의 말, 행동 모두를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심을 압니다. 여기에 경건이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가 되어 분석심리학의 개척자가 된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은 말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 나의 저술들은 내 생애의 정류장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것들은 나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다. 무의식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는 내가 행한 것, 내 정신의 작업이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놓을 수가 없다.”
 
1961년 6월 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융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언젠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층으로 나뉜다. 우선 의식에 해당하는 자아(나, 또는 에고)가 있고, 그 아래에 개인무의식(‘그림자’가 있는 곳)과 집단무의식(‘아니마와’ ‘아니무스,’ ‘원형’이 있는 곳)이 있고, 마음의 맨 한가운데에 바로 ‘자기’가 있다.
 
자기실현의 최종 단계인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 온전하게 통합된 것을 말하며, 우리의 의식을 일컫는 ‘자아’보다는 더욱 큰 개념이다. 융은 이것을 ‘자기원형’이라고 불렀으며, 그 궁극의 형태는 신(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도 유사한 개념이라고 간주해서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자기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경우에는 사람이 자칫 개인지상주의나 자아팽창에 빠져서 결국 과대망상을 품기 쉽다고 지적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살아남는 자는 가장 강한 자도, 가장 현명한 자도 아닌 변화하는 자다.”찰스 다윈의 말이다. 자연은 그렇게 변화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도마뱀의 경우 적을 만날 경우 스스로 꼬리를 잘라 먹잇감으로 던져주면서 도망간다. 생존을 위해 자기 살점을 덜어내는 식이다. 주목할 부분은 꼬리의 3할 이내만 끊는다는 점이다. 너무 많이 자르면 도마뱀 스스로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미래학자들이 꼽는 21세기 핵심 역량 중 하나는 상상력 즉 창의력이다. 스티브 잡스에 의하면 창의력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능력이다. ‘축구’와 ‘야구’를 연결해 긴장과 불안을 뛰어넘는 것. ‘내 것’과 ‘남의 것’을 연결지어 ‘우리’로 확장해가는 능력은 ‘점’과 ‘점’을 잇는 능력인 셈이다.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에 있다. 우리 총회에 성경을 전하고 실천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지닌 지도자가 부족한 이유는 정연한 설교가 윤희원 목사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임재의식 즉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말씀을 행하는 자(약 1:22)로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창의적 지도력은 신앙의 근육이다.
 
2019-08-16
[ 김영배 ethegoodnews@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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