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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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Frida>
감독 : 줄리 테이머
출연 : 셀마 헤이엑, 알프레드 몰리나
음악 : 엘리엇 골덴탈
 
제목 : 아픈, 그러나 뜨거운 어느 예술가의 초상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리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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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있다. 신이 준 온갖 불우와 고난을 온몸으로 껴안고, 현실로 인정하고, 열정으로 녹여내고, 예술로 승화시켜 마침내 전설이 되어버린 여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년 멕시코 출생.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으며, 18세 때 겪은 교통사고로 만신창이가 되어 수십 차례의 거듭된 수술에 후유증으로 생애를 수놓았다. 쇠파이프로 척추를 보정하고, 허리에는 강철 코르셋을 단단히 조여매고 살았다. 차량 파편이 엉덩이를 뚫고 들어가 자궁을 관통한 덕분에 훗날 아이를 유산해야 했고, 40대 후반에는 한쪽 다리를 잘라내고 말았다.
 
통증으로 해가 뜨고 지는 삶은 하냥 아득했고, 아득함의 허방은 깊었다. 허방은 억겁의 시간으로 다가왔고, 억겁의 허방 앞에서 꿈은 모래처럼 부서졌다, 안개처럼 스러졌다. 안개 속에서 확실한 것은 그 순간 대지를 딛고 선 발뿐, 그러므로 프리다에게는 오직 현실만이 존재했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삶의 껍질을 벗는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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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현실을 온전히 받아내자 프리다의 어둠은 열정이 되고, 불꽃이 되고, 바야흐로 꿈이 되었다. 그리고 영화가 되었다. 프리다를 영화로 만든 주인공은 셀마 헤이엑, 멕시코가 낳은 금세기 최고의 스크린 요정이다. 프리다의 팬이었던 셀마 헤이엑은 프로듀서를 자청하며 신들린 듯 뛰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에드워드 노튼, 애슐리 쥬드 등 호화 캐스트를 동원하고, 프리다와 디에고의 저작권자인 돌로레스 올메도를 설득한 뒤 미라맥스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냈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리다의 그림 가운데 몇 점은 직접 그리기도 했다. 심지어는 담당 공무원이 유적지 Teotihuacan에서의 촬영을 거부하자 직접 대통령을 찾아가 특별허가를 받아냈다.
 
혼신의 열정은 연기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프리다의 불꽃 생애와 고통에 전 내면의 한 올 한 올까지 스크린 위로 생생하게 피어올랐다. 실제로 프리다가 입던 옷이 몸에 꼭 맞을 정도로, 셀마는 프리다 자체였다. “셀마는 프리다를 연기하도록 운명지어졌다. 프리다의 영혼이 셀마를 이끌어주는 것 같았다. 셀마는 프리다의 환생이었다”라고 감독 줄리 테이머는 전한다.
 
거개의 전기 영화가 그렇듯이, 영화는 프리다의 고통을 전하기보다 아픔을 뛰어넘는 프리다의 초월과 스스로를 불사르는 몰아, 영감과 상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의 숙명적인 사랑, 행복의 샘이자 불행의 씨앗. 당대에 피카소와 칸딘스키를 방불케 했던,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영화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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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프리다에게 디에고를 주었고, 디에고에게는 주체 못하는 바람둥이 기질을 주었다. 중독에 가까운 섹스 집착으로 미추를 불문하는 전천후 카사노바 디에고는 부적절한 현장을 들킬 때마다 “섹스는 형식적인 악수보다도 무의미한 행위일 뿐”이라며 프리다를 달랜다. 실제 삶에서도 디에고의 마음은 늘 프리다 곁에 있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 다른 여인의 ‘살’을 찾아다니는 육체가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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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의 ‘무의미한 행위’는 그러나, 프리다에게 너무나 ‘유의미한 상처’였다. 프리다는 육체의 고통에 대해서는 ‘철의 여인’이었으나 마음의 상처에는 나비처럼 유약했다. 안팎의 고통을 견디면서 프리다는 일상의 고치를 벗고 예술의 날개를 편다. 육체의 고통은 프리다에게 영감을 일깨워주었고, 마음의 상처는 그녀의 손에 붓을 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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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와 디에고는 죽어라 사랑했고, 죽기로 싸웠으며, 죽을 듯이 재결합했고, 죽도록 함께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과 예술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초현실주의적인 영상 화풍을 보여준다. 영화 ‘프리다’의 힘은 프리다의 삶에서 온 것이지만, 스토리 이상의 웅숭깊은 매력을 배태하고 있다. 내러티브는 오히려 극도로 간결하게 응축되었다. 그 위에 그림과 음악의 짙은 감성이 드리워져 있다.
 
그림에서 사건으로, 또는 사건에서 그림으로 넘나드는 고도의 상징을 통해 프리다의 내면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음악은 감동을 3차원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진품처럼 보이는 프리다와 디에고의 그림을 위해 제작진은 40명의 목수와 35명의 세트화가, 그리고 15명의 프리다·디에고 전문 복제화가를 동원해 50편에 달하는 작품을 복원했다. 그림은 다시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실사 영상으로 넘나들고, 그 변이가 빚어내는 상징과 페이소스가 더없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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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골덴탈의 음악은 프리다와 관객 사이에 가슴과 가슴으로 공명판을 댄다. 프리다가 울면 관객의 가슴이 미어지고 프리다가 춤을 추면 관객도 덩달아 날아오르는, 멕시코 전통음악과 라틴풍의 절묘한 결합. 멕시코 기타인 비우엘라와 멕시코 하프, 마림바, 글래스 하모니카 등의 전통악기와 마리아치 음악, 그리고 아프로-쿠반 계열의 보컬이 빚어내는 긴장과 이완의 하모니는 2003년 아카데미로 하여금 작곡상을 바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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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는 일기에 ‘나는 디에고를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한다’고 썼다. 다리를 자른 뒤 급격히 쇠약해진 그녀는 채 1년을 못 넘기고 48세를 끝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낀 프리다는 매니저인 엠마 우르타도를 불러, 자기가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해달라고,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한 대로 엠마는 프리다가 떠난 이듬해 디에고와 결혼식을 올렸고, 육체의 부름에 충실했던 결과로 성기암에 시달리던 디에고는 결혼한 다음해 프리다를 따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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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일기 마지막 장에는 죽음의 사자 그림 옆에 짧은 글이 붙어 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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