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김동인의 영혼 변론 - 엄상익
2019/12/06 15: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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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김동인의 영혼 변론
 
이천 년대 초 시대의 광풍이 불고 있었다. 세상을 바로 세운다고 하면서 일부 역사학자들이 연구실을 나와 위원회의 완장을 차고 죽은 영혼들을 저승에서 현실의 심판대로 불러올렸다.

육십 년 전 불 속에서 백골이 되어 영원으로 떠난 소설가 김동인에 대한 친일의 단죄가 위원회에서 벌어졌다. 다른 세상에서 지내고 있던 그의 영혼이 세상의 굿판에 이끌려 나와 법정에서 변호인인 나와 함께 섰다. 그는 이미 몸도 입도 없는 관념이 되어 그의 영혼과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혼은 곳곳에서 발견됐다. 그가 평생 쓴 글 속에서, 그의 영혼이 살고 있는 늙은 아들딸의 마음속에서, 어떤 때는 늦은 밤 환시 속에서 그의 말 없는 말이 내게 들려왔다. 그는 칼바람이 치는 겨울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천정을 바라보며 죽어갔다. 그의 방에는 그가 꿈꾸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광대한 대하소설로 펼쳐보려고 준비했던 원고지들이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그는 수없이 가시에 찔린 것 같았다. 그에 관한 논문들이 유독 많았다. 논문들 속에서 김동인은 양복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코에 걸친 멋쟁이었다. 부잣집 아들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오고 기생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는 문학가들의 날카로운 펜촉에 찔려 방탕아가 되어 있었다. 그 펜촉에는 원인 모를 시샘과 질투의 독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영혼에 또 다른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완장을 찬 역사학자들이었다. 그가 살던 일제 강점기에 쓴 몇 편의 글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것이다. 시대적 조류 속에서 철학 없는 현직 판사들은 위원회의 결정에 순종했다.
 
변호사인 나는 역사와 사람을 그들이 가진 색안경을 통해 보고 싶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고 싶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들어가 그 시점의 평균인의 시각으로 그들과 공감해 보고 그의 아픔을 나누고 싶었다. 그게 학자가 아닌 평범한 변호사의 소명이기도 했다.

김동인은 중학교 시절부터 이미 문학의 신을 모시기로 결심했다. 법과대학이나 의과대학을 가기 바라는 부모의 희망을 세속적인 것으로 물리치고 글쓰기를 일생의 업으로 삼기로 했다. 그는 가진 재물을 문학의 제단에 번제물로 올렸다. 그에 의해 한국 최초의 한글 문학지 ‘창조’가 나왔다. 그는 오직 글로만 삶의 승부를 보겠다고 결심한 문학의 구도자였다. 그는 자유인이자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의 예술은 세상의 인위적인 경계들을 넘은 미의 추구였다. 삼국시대 백제와 일본의 역사적 교류를 소설의 모티프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국기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얀 바탕에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 원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뛰어난 디자인이라고 했다. 그런 그의 글들이 해방 육십 년 후에 그를 친일파로 심판하는 근거가 됐다. 이해할 수 없었다. 현대를 사는 내가 봐도 그의 글에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시대의 광풍 속에서 만들어진 위원회는 태평양 전쟁 시 만들어진 영화에 출연했던 조선인 배우들을 친일파로 단죄하기도 했다. 영화 속에서 전쟁을 부추기는 대사를 했다는 이유였다. 살아보지 않은 그 시대를 현대의 완장들은 마구 심판하는 것 같았다.

해방 후 친일파 재판은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다.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우치면 해외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면 전부 친일파가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일파로 처벌하자면 반민족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민족을 배신한 행위를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험난한 그 시대는 예술가인 김동인을 민족주의자로 만들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그는 격문을 써서 감옥에 갔었다. 그는 예전에 있던 나라가 잊혀가던 그 시절 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조선의 마지막 운명을 소설로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그의 글은 전 국민의 피를 끓게 하고 조선의 혼을 되살렸다. 그는 일본 천황을 모독했다는 죄로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리고 집에 마지막까지 태극기를 보관하고 있던 애국자였다. 해방 후 김구 주석은 그에게 자신의 일대기를 부탁하기도 했다. 증오가 들끓던 해방정국에서 그 누구도 그를 친일파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육십 년 후 대한민국은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었다. 그건 잔인한 인격살인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위원회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정부와 사법부의 그런 결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언젠가는 그에 대한 순수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날을 위해서 재판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시절을 주변인으로 살아간 한 작가의 모습을 진솔하게 표현해 보려고 노력했다.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변론을 책으로 남겨둔다. 후세의 작가와 대중 그리고 역사가 나의 변론을 보고 다시 한 번 심판해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2019년 11월
서초동 개인법률사무소에서
엄 상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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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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